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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40. 늦가을의 소박한 기적 ‘털별꽃아재비’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11. 12.

털별꽃아재비는 더이상 새로운 들꽃을 피워내지 않는 늦가을에도 온전한 꽃송이를 마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들꽃이다.

정말 주변에서 흔하디흔한 꽃인데 이를 알아보는 이들이 거의 없다.

꽃송이가 워낙 작은데다 볼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꽃들이 자취를 감춘 이맘 때 털별꽃아재비의 소박함이 더 아름답다.


다음 주부터 다른 계절의 꽃들을 쓸 생각이다.

그동안 그냥 주위에서 쉽게 보이는 꽃으로 기사를 날로 먹었는데,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11월 13일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할리우드 영화 ‘마션’을 보신 많은 분들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감자 농사를 꼽더군요. 극 중 화성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 ‘마크 휘트니(맷 데이먼 분)’는 생존을 위해 화성 기지에 남은 감자들로 농사를 짓습니다. 감자 농사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단순히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감자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절망 대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으니까요. 

과거 영화와 비슷한 실험이 구 소련(현 러시아)에서 이뤄진 일이 있습니다. 구 소련은 지난 1986년 인류 최초의 우주정거장 ‘미르(Mir)’의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미르’에선 다양한 실험들이 이뤄졌는데, 그 중 하나가 우주정원이었죠. 우주정원은 당초 우주에서의 식량 생산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지만, 새로운 효과도 있음이 밝혀집니다. 바로 식물을 가꾸고 바라보는 일이 우주비행사들에게 정서와 심리의 안정에 매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었죠.

서울 청계천에서 촬영한 털별꽃아재비.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늦가을은 더 이상 새로운 들꽃을 피워내지 않습니다. 지난 계절에 푸르렀던 나뭇잎은 단풍으로 풋기와 물기를 털어낸 뒤 낙엽돼 흩어져 가고, 땅은 온기를 잃으며 메말라 가는 계절입니다. 그런 계절에도 기적처럼 생생하게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털별꽃아재비는 이맘때에도 온전히 꽃송이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죠.

털별꽃아재비는 중남미의 열대 지역을 원산으로 하는 국화과 별꽃아재비속 한해살이풀입니다. 털별꽃아재비는 6~10월에 꽃을 피우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기나 초겨울에도 꽃을 피운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죠.

털별꽃아재비는 털이 많은 잎과 별꽃을 살짝 닮은 꽃의 생김새 때문에 독특한 이름을 얻었지만, 종종 ‘쓰레기풀’이라고도 불립니다. 농부들은 밭을 순식간에 덮는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털별꽃아재비가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털별꽃아재비는 매우 흔한 꽃임에도 불구하고 꽃의 크기가 6~7㎜가량으로 매우 작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이 때문에 털별꽃아재비는 먼 곳에서 이 땅으로 건너왔지만 늘 홀대받는 처지이죠. 그러나 털별꽃아재비가 사람의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리 ‘쓰레기풀’이라고 불려도 털별꽃아재비는 매년 그 자리에서 묵묵히 피고 지는 일을 거듭할 따름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죠.

서울 청계천에서 촬영한 털별꽃아재비.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털별꽃아재비의 꽃말은 ‘순박함’입니다. 출근길 살갗에 닿는 바람이 점점 겨울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매 계절마다 다채로운 꽃을 피워내던 길가의 화단은 이제 초췌한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화단의 구석에 들러붙어 기어이 수많은 꽃들을 피워낸 털별꽃아재비의 순박한 모습은 마치 기적처럼 아름다웠습니다.

털별꽃아재비가 지구 반대 편 타지에서 이어가고 있는 삶은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또 피워냈기에 가능했던 작은 기적일 것입니다. 털별꽃아재비는 기자에게 삶은 살아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현자(賢者)는 거리의 화단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