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술 냄새가 진동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강원도의 허름한 바닷가 술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노년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그의 생을 잘 아는 미스테리한 청년과 예고 없이 술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가 이 작품을 이끄는 물줄기다.
물줄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청년은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생을 흔들었던 사건에 닻을 내린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핑계로 묻어뒀던 아픈 기억과 시대상이 선명하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직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빌릴 가장 쉬운 방법은 술 아니겠나.
깨어나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변방의식과 회한이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수도권 과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현실이 있다.
여전히 인구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작품은 50년대 삼척에서 태어나 70년대 강릉에서 대학에 다닌 주인공을 통해 당대에 서울이 지방에 미친 영향과 지방이 서울을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70년대와 80년대 현대사의 비극이 지방에 사는 청년과 이어지는 과정을 아프게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나보다 한 세대 전의 역사를 다루지만 낯설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은 대부분 서울이고, 중앙언론사는 물론 지방언론사까지도 서울 소식을 지방 소식보다 비중 있게 전한다.
이 때문에 지방에 살면서도 지방의 현실에 어두워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담론을 살펴봐도 지방의 현실을 다루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지방에도 수도권 못지않게 많은 청년이 살고 있지만, 파편화돼 흩어져 있어 힘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이 반복되다 보니 뭘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이 내면에 쌓인다.
지방공동화가 가속화되는 이유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머릿속에 기시감이 맴돌았다.
내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일하며 보고 느꼈던 감정이니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묵직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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