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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상지 “‘오타쿠’들에게 깊은 인상 남길 음악 만들고 싶었다”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4. 9. 27. 23:37

앨범 발매 예정 소식을 듣고 정말 만나고 싶었던 연주자였다.

고상지는 그 어느 뮤지션보다도 솔직하면서도 소탈한 태도로 나를 놀래켰다.

그런 솔직함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인터뷰와 상관없는 다양한 이야기로 잡담을 꽃피우기도 했다.

정말 멋진 앨범이다! 강추!!!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반도네온연주자 고상지는 자신의 앨범보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에 더욱 흥분했다. ‘드래곤 퀘스트’ ‘베르세르크’ ‘에반게리온’ 등 자신의 음악에 영감을 줬다는 다양한 작품들을 언급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상기된 그의 표정에선 ‘오타쿠(무언가에 깊이 빠진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인터뷰가 제대로 흘러갈까 했던 우려는 잠시, 음악과 멀게만 느껴졌던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라는 주제는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접점을 찾으며 한 덩어리를 이뤄나갔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고상지를 만나 첫 정규앨범 ‘마이크그레(Maycgre) 1.0’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애니메이션 속 탱고, 반도네온을 알게 하다=고상지는 “어려서부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즐겼고 그 작품 속 배경음악을 좋아했는데, 그 음악의 상당수가 탱고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며 “탱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게임과 애니메이션 때문이고 내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친만큼, 내 이름을 발매하는 첫 앨범에 내 취향을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상지는 국내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자로 꼽힌다. 이국적인 음색과 멜로디가 필요한 곡에는 어김없이 그의 연주가 들어갔다. 네모난 주름상자와 71개의 버튼으로 구성된 반도네온은 1846년 독일의 하인리히 반트(Heinrich Band)가 아코디언을 기초로 고안했다.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로 흘러들어간 반도네온은 탱고 연주에 널리 쓰이며 비센테 그레코(1886~1924),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 등 명연주자들을 탄생시키며 탱고를 대표하는 악기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반도네온은 낯선 모양새만큼 국내에선 여전히 생소한 악기다.


고상지는 “밴드 동아리에서 베이스와 피아노를 연주하며 음악에 빠져 있던 대학 재학 시절, 우연히 반도네온 연주를 직접 보게 된 뒤 반도네온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악기는 아니지만 이모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계셔서 다행히 악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던 고상지는 동아리에서 벗어나 버스킹(거리 공연) 문화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반도네온을 들고 연주를 위해 거리에 섰다. 희소한 악기의 격정적이면서도 구슬픈 음색에 관객들은 환호를 보냈다. 고상지의 공연을 접한 한 일본인이 일본 출신 세계적인 반도네온 연주자 코마츠 료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 이메일은 고상지가 코마츠 료타에게 반도네온을 사사하는 계기가 됐다. 2006년부터 코마츠 료타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3년 간 도쿄 반도네온 클럽 정기연주회 무대에 오르며 기량을 높였다. 이후 정재형, 김동률, 윤상, 유희열, 이적, 가인, 엠블랙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이름을 알린 고상지는 지난 2011년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편에 출연해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쌓았다.

고상지는 “기타, 피아노와는 달리 희소성 덕분에 빨리 길을 찾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국내에서 좋은 연주를 볼 기회가 적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며 “실력 있는 반도네온 연주자들이 늘어나 서로에게 긍정적인 미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 탱고로 다시 풀어낸 추억 속 애니메이션= 이번 앨범에는 어린 시절에 본 영화 ‘위대한 유산’의 오래된 집을 떠올리며 곡을 쓴 타이틀곡 ‘빗물 고인 방’을 비롯해 앨범 발매 전 싱글로 선공개된 ‘출격’, 애니메이션 속 강한 여성 캐릭터들의 공통점이 붉은 머리였음을 상기하며 만든 ‘레드 헤어 헤로인(Red Hair Heroin)’, ‘시벌리(Chivalry)’, ‘아타키(Ataque)’, ‘홍제천의 그믐달’ ‘아 로스 아만테스(A Los Amantes)’ ‘엔비(Envy)’ ‘암(暗)’ 등 9곡이 실려 있다. 고상지는 앨범의 전곡을 작곡ㆍ편곡하고 프로듀싱을 맡았다. 탱고하면 떠오르는 슬프고 격정적인 분위기 대신 ‘메카닉 애니메이션(로봇이 등장하는 만화)’을 연상케 하는 호쾌한 편곡과 연주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준다. 애니메이션을 향한 고상지의 애정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6명의 캐릭터의 두문자를 조합해 만들었다는 앨범 타이틀 ‘마이크그레’에서도 엿보인다. 

고상지는 “내가 연주하는 탱고를 파격적으로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탱고를 내 방식대로 풀어낸 것일 뿐이지 무언가 새로운 요소를 더하지는 않았다”며 “실제 아르헨티나 본토의 탱고는 단순히 슬픔과 격정의 감정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음악적인 폭이 훨씬 넓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번 앨범을 통해 틀에 박힌 탱고 이미지 너머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사진 설명 : 첫 정규 앨범 ‘마이크그레(Maycgre) 1.0’을 발표한 반도네온연주자 고상지가 지난 25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반도네온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음악적 원근법과 과장된 연출법을 표현한 이 싱글의 수록곡 ‘출격’ 뮤직비디오는 반도네온이 주인공으로 분한 파격적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오타쿠’가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상지는 “그렇게 불리기에는 깊이(?)가 많이 부족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상지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타쿠’들의 열정 덕분이었다”며 “나는 ‘오타쿠’를 진심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이들보다도 ‘오타쿠’들에게 인정받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요즘 들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을 언급하는 누리꾼들 중 프로필 사진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으로 설정된 이들이 부쩍 늘었다”며 “나를 ‘씹덕(‘오타쿠’를 속되게 강조한 표현)’이라고 부르는 다소 과격한 그들의 표현이 그 어떤 호평보다도 즐겁다”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고상지는 반도네온을 대중이 손에 쥐기 어려운 고가의 악기로 생각하며 경원시하는 일부의 시각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반도네온이 초보 연주자입장에선 구하기 어려운 고가의 악기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프로 연주자 입장에선 결코 비싼 악기라고 할 수 없다”며 “다수의 프로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클래식 악기와 기타들이 반도네온보다 훨씬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해를 받는 부분에 대해선 조금씩 고쳐 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편, 고상지는 오는 10월 25일 오후 7시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에서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고상지는 이번 앨범의 수록곡들을 비롯해 ‘강철의 연금술사’ ‘에반게리온 Q’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 배경음악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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