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내친구 앨리스·앤·삐삐”… 엄마와 딸, ‘소녀’와의 추억을 꺼내다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6. 28. 11:24

내가 그리 신뢰하지 않는 책 중 하나가 기자가 쓴 책이다.
기자가 쓴 책 중에서 잘 쓴 책을 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기자가 쓴 책을 잘 소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큰 부분이 부족한 완성도와 뻔한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은 지금까지 내가 접한 기자들이 쓴 책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다.
기자가 저자란 사실을 감추는 게 오히려 세일즈에 유리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저자 본인도 책에 자신이 기자란 사실을 최소한으로 노출시켰다.

이 책의 저자는 기자인 엄마와 대학생인 딸이다.
둘은 캔디, 삐삐 등 고전 동화와 애니메이션 속 익숙한 소녀 캐릭터들을 각각 다른 시각과 표현 방법으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찰한다.
다른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비슷한 모녀의 시각이 이채롭다.
문장에 대단히 정성을 들였고, 오랜 시간 주제를 고민했음이 페이지마다 느껴지는 책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1인 출판사를 통해 출간됐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면(특히 문화부에서 출판을 오래 맡았다면!) 다른 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출판사에서 폼 나게 책을 낼 기회를 얻기 쉽다.
그런데도 책의 주제를 잘 이해하는 1인 출판사를 통해 출간을 결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포장보다 내용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로 보여서.

문화일보 6월 28일자 26면에 리뷰 기사를 실었다.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 최현미·노신회 지음 / 혜화1117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도로시’인데 왜 제목에 그 이름이 없는 걸까. 할 말은 하고 사는 당찬 ‘캔디’는 왜 남자들 앞에만 서면 작아질까. 시대의 변화는 관점의 변화를 이끌고, 관점의 변화는 익숙함 속에 숨은 새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고전이 시대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이유일 테다. 이 책은 고전 동화부터 현대 애니메이션까지 작품 속 다양한 ‘소녀’들을 오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찰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할 부분은 두 저자다. 두 저자는 각각 50대와 20대 여성으로 모녀 관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빨간 머리 앤’의 ‘앤’, ‘삐삐 롱스타킹’의 ‘삐삐’, ‘피터 팬’의 ‘웬디’ 등…. 세대는 다르지만, 모녀는 어린 시절에 같은 ‘소녀’들과 동행했다. 

세대가 다른 만큼, 두 저자가 ‘소녀’들을 바라보고 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활자 매체에 익숙한 세대인 엄마는 ‘소녀’들의 과거와 현재의 의미를 섬세한 문장으로 깊이 사유한다. 반면 성장 과정에서 멀티미디어의 세례를 받은 딸은 삽화, 사진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자유롭게 ‘소녀’들에 관한 생각을 표현한다.

두 저자는 어린 시절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녀’들의 한계와 아쉬움을 각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소나기’를 두고 엄마는 왜 소녀의 사랑 앞에만 ‘잔망스러운’이란 표현이 붙는지, 딸은 첫사랑 서사에서 왜 소녀만 병약하고 죽음을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어공주’를 향해 엄마는 그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왕자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했다며 아쉬워하고, 딸은 게임의 형식을 빌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왕자를 단호히 거부하는 새로운 공주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며 때로는 비슷하게, 때로는 미묘하게 다른 결론을 내리는 두 저자의 시선이 흥미롭게 교차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저자가 오랜만에 재회한 ‘소녀’들을 익숙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으로 냉대한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두 저자가 ‘소녀’들을 바라보는 시선 아래엔 따뜻한 애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뼛속까지 귀족 의식으로 채워져 있는 ‘소공녀’의 ‘사라’에게 작별을 고하면서도, 어린 시절 이야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그를 마음속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다. 딸은 현실로 돌아와 다시 나이를 먹게 된 ‘피터 팬’의 ‘웬디’를 향해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멋진 여성이란 찬사를 보낸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저자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소녀’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헌사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 책은 세대를 초월해 같은 친구를 가진 두 저자가 이 친구들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유대 관계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들은 머리말을 통해 “서로의 작업물을 보고 난 뒤 특별히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예상 밖으로 비슷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많아 놀랐다”며 “아무리 시대 변화에 상처 입어도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과 그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324쪽, 1만65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