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슨 가족이 사는 법 / 윌리엄 어윈·마크 T. 코너드·이언 J.스코블 엮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美 장수 인기 애니‘심슨 가족’
일상 통해 현대사회 군상 표현
등장 인물의 성격·사건·심리
철학자들 핵심 사상으로 설명
식탐강하고 이기적인 호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찾고
리사모습통해 반지성주의 우려
철학.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며 고개를 저을 사람이 많은 단어다. 그런데 우리가 재미로 시청하는 애니메이션을 철학 교재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철학이 살짝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출발해 미국의 장수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및 심리를 철학을 동원해 그럴싸한 ‘썰’로 풀어낸다. 괜히 읽기 전부터 두꺼운 분량에 ‘쫄지’ 않아도 된다. 그저 웃기고 흥미로운 ‘썰’의 모음일 뿐이니까. 가끔 꽤 진지한 방향으로 빠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땐 해당 페이지를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도 무방하다. ‘유머’를 ‘다큐’로 받아들이면 서로 곤란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선 ‘심슨 가족’이 어떤 애니메이션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스프링필드라는 도시에 사는 남편 호머와 아내 마지, 아들 바트, 딸 리사와 매기로 이뤄진 심슨 가족과 그 주변인들의 일상을 통해 현대사회의 다양한 군상과 면면을 드러내는 가족 시트콤이다. 지난 1987년 버라이어티 쇼 ‘트레이시 울먼 쇼’의 한 꼭지로 방영을 시작한 이 작품은 1989년부터 폭스 TV에서 독립 프로그램으로 30년째 매주 한 편씩 방영 중이다. 곳곳에 담긴 블랙 코미디와 사회 풍자가 일품이어서 이 작품은 아이보다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란 평가를 받아 왔다.
이 책은 ‘심슨 가족’이란 친숙한 애니메이션을 철학의 주요 개념, 위대한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으로 녹여내 철학 입문의 문턱을 낮춘다. 우선 이 책은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철학의 주제를 다루고, 작품에 숨겨진 다양한 흥미로운 요소를 탐구한다.
이기적이면서 식탐이 강하고 우둔한 호머는 순수하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이 책은 호머의 태도에서 “인간은 무엇이 행복인지, 삶에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고도 보지 못한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찾는다. 호머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삶의 태도에서 존경할 만한 부분은 있다는 것이다. 옳은 말만 해 외로움을 느끼는 똑똑한 리사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반지성주의를 우려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이지만 종종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매기의 모습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저서 ‘말’을 끌어와 소통을 위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남편과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하고 매 순간 적당한 정의감을 발휘하는 마지의 모습에서 그리스 철학의 정신적으로 만족하는 행복관을 의미하는 ‘에우다이모니아’ 개념을 끌어낸다. 온갖 못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바트를 통해 “탈선과 불신, 가식과 조롱을 즐기는 이기심은 건강하다는 신호”라고 주장한 프리드리히 니체를 소환한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심각하게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 하는 ‘썰’을 읽다 보면 ‘뜨악!(D’oh!)”이란 호머의 입버릇이 절로 튀어나온다.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에 주목해 문제의식을 끌어내는 부분도 날카롭다. 이 책은 칸트주의적 관점에서 개성 강한 심슨 가족 구성원 각각이 살아가는 방식을 조명하면서,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의무를 다하는 개인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음을 논증한다. 또한 여러 등장인물과 사건을 통해 “위선은 항상 나쁜가” “진실성은 위선의 반대인가” 등 다소 무거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남성 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스프링필드와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돌아가는 에피소드에 비판을 제기하는 부분에선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쓴 페미니즘 이슈에 관한 문제의식도 엿보인다.
이 책의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쯤엔 호머가 남긴 숱한 ‘망언’이 ‘명언’으로 들리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시도란 실패로 가는 첫걸음”이란 호머의 냉소가 사르트르의 “모든 인간 행위는 동일하며 모든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원칙에 놓여 있다”란 말과 무엇이 다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머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얘들아, 최선을 다했지만 무참히 실패했다면 다신 노력 따위는 하지 말아라.” 어설픈 위로보다 훨씬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말이 아닌가. 물론 호머는 “만화영화에 심오한 의미 따윈 없어. 싸구려 웃음을 선사할 뿐이라고”라며 비웃겠지만 말이다. 492쪽, 2만20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