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명작의 공간>21세기 ‘세월호 義人’ 보내고… 18세기 ‘청계천 義人’ 불러내다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7. 26. 15:11
문화일보가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하는 ‘명작의 공간’ 코너에 이번 엔 김탁환 선생님을 모셨다.
김 선생님은 지난해 출간한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공간인 청계천을 주제로 원고를 보내주셨다.
원고를 받기에 앞서 지난주에 나는 김 선생님과 작품 속 공간인 청계천 답사에 동행했었다.
소설 속 청계천과 오늘날 청계천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 공간을 원작자와 함께 걸으며 설명을 듣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기사는 문화일보 7월 26일 자 31면 전면에 실렸다.

----------------------------------



김탁환 작가의 장편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 등장하는 공간인 수표교 아래에서 바라본 청계천. 수표교는 작품의 주인공 ‘달문’을 비롯해 거지 패들이 모이는 청계천의 장소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김탁환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청계천

영조 시절의 ‘거지 광대’ 달문 

당대 추남이자 조선 제일 춤꾼 

이웃에 돈 나눠주고 거지 생활 

일자무식이지만 지혜의 치유자

중심에 서지 않고 주변 머물러

달문이 예수야? 석가모니야? 

의심 품고 지내다 세월호 참사 

그 곳에서 만난 수많은 의인들 

故 김관홍 잠수사 보내고 난뒤 

떠오르는 사내가 ‘달문’이었다


7월 뙤약볕 아래 광통교에서 오간수교까지 걸었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등장인물 달문과 모독, 표철주가 누빈 삶의 현장이면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미 답사한 천(川)이다. 장편소설을 출간한 다음 그 길을 되짚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토록 고고한 연예’는 예외다. 달문을 주인공으로 창작판소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조 시절 거지 광대 달문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7년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후 연암 박지원의 소설집 ‘방경각외전’을 읽다가 ‘광문자전’을 접한 것이다. 거지 왕초로 탁월한 춤 솜씨를 자랑하던 달문은 당대 손꼽히는 추남이기도 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고 연암이 적을 정도였다. 조선에서 제일 못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면, 그것은 추한 것인가 아름다운 것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만 취하겠지만, 달문에겐 미추(美醜)가 함께 붙어 다녔다. 한동안 달문을 잊고 지냈다. 1996년 소설가로 등단하고 나선 이순신, 허균, 황진이를 쓰느라 바빴다. 평생 쓸 역사추리소설 시리즈로 백탑파를 꿈꿀 때, 달문을 계륵처럼 집었다가 놓곤 했다. 

달문은 박지원보다도 딱 30세가 많으니, 정조 연간에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백탑파보다 한두 세대쯤 앞섰다.


광통교는 서울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놓인 다리로, 조선 시대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다.


다시 달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8년 봄 ‘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전 4권)이란 흥미로운 공동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반 만 년 역사에서 내가 택한 캐릭터는 전우치였다. ‘부여 현감 귀신체포기’(2005)라는 지괴소설에서 이미 한 차례 다루기도 했던 전우치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모험과 추리를 펼치는 이야기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저자 증정본을 받은 후 다른 이들은 어떤 캐릭터를 택했는지 훑었다. 그중에서 소제목 하나가 눈에 번쩍 띄었다. ‘광막한 천지에 부는 바람 같은 사내’! 그 사내가 곧 달문이었다.

달문에 관한 논문과 자료를 찾아 읽으며, 미추에 더하여 세 가지 점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하나는 빈부(貧富). 달문은 평생 종루와 개천(開川, 청계천의 옛 이름)을 오가며 거지로 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또한 탁월한 춤과 재담으로 놀이판을 휘어잡으며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땅 사고 집 사서 떵떵거리는 대신, 달문은 그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곤 평생 무일푼으로 지냈다. 가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가난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돈과 재물을 나눠줬다는 점에서 그는 부자였다. 가난하지만 비루하진 않았다.

두 번째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달문은 한문은 물론, 한글을 익힌 적도 없고 셈법에도 어두운 사람이었다.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은 그에게 많은 이들이 도움을 청했다. 막심 고리키의 중편소설 ‘은둔자’에는 마을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톱장이 사벨이 등장한다. 달문 역시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도성 안팎에 사는 이들을 만났고 위로했으며,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제 일처럼 애썼다. 달문은 일자무식이었으나 지혜로운 치유자였다. 

마지막은 중심과 주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기와 함께 따라오는 것이 돈과 권세다. 한양에 머무른다면 죽을 때까지 편히 지낼 상황이었지만, 달문은 훌쩍 도성을 떠났다. 조선통신사를 따라 부산포까지 내려가선 놀이판을 크게 벌였고, 그 후론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중심을 차지한 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짓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누구든 인간으로서도 예술가로서도 내리막인 것이다. 달문은 처음부터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서게 되더라도, 곧 주변으로 달아났다.

2008년 봄부터 가을까지 청계천을 밤낮으로 오갔지만, 소설을 쓰진 못했다. 평생 만나기 힘든 캐릭터는 분명했으나 달문을 제대로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특징을 지닌 달문은 평생 손해만 보며 살았던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의심이 불쑥불쑥 들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 달문이 예수 그리스도야, 석가모니야?” 

또 세월이 흘렀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가 났다. 그 후 나는 동거차도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다양한 만남들이 없었다면, 달문을 장편으로 다루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길의 자원봉사자들은 손해를 보고 손해를 또 보는 사람들이었다.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다면 시간도 돈도 힘도 다 쏟아부었다. 김관홍 잠수사도 박종필 감독도 물론 거기에 속했다. 몇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바뀌더라도 내 첫 질문은 똑같았다. “왜 그곳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그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지만 또 하나이기도 했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가고 싶었어요. 또 그건 손해도 아닙니다.”

2016년 여름은 더 어둡고 무더웠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요원했고, 제1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강제로 종료될 위기에 처했다. 김관홍 잠수사가 6월 17일 세상을 떴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지만, 그와의 인터뷰에 바탕을 둔 장편소설 ‘거짓말이다’의 퇴고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작업실을 무작정 나와 걸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시청으로 내려가다가 청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광통교에서 오간수교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다. 의로운 사람, 타인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부분을 내어준 이가 왜 이렇듯 빨리 세상을 떠난단 말인가. 그 질문의 끝에 또 한 사내가 떠올랐다. 청계천을 수없이 오가며 힘겹고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보듬은 사내, 달문이었다.


‘거짓말이다’를 출간하자마자 달문에 대한 자료를 10년 만에 다시 꺼냈다. 그때는 믿지 못해 밀어냈던 일화들이 품에 쏙 안겼다. 세월호 참사 후 만난 이들의 언행에서 이미 듣고 본 것들도 많았다. 달문을 의심하던 10년 전부터 달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10년 후의 내 모습을 소설에 넣고 싶었다. ‘모독(冒瀆)’이라는 불만투성이 소설가 지망생을 달문 곁에 붙이자 청계천 주변이 더욱 살아났다. 모독이 대광통교에서 소설에 필요한 종이를 사고, 소광통교 쥐 영감 세책방에서 소설을 빌린 뒤, 동대문 시장까지 걷는 천변풍경이 그려졌다. 그 길은 또한 달문이 평생을 걷고 뛰고 때론 누워 뒹굴며 즐긴 곳이었다.

논저와 사료의 재검토를 마치자 겨울이었고 촛불 정국이 시작됐다. 매주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으며, 또 가끔은 조명이 근사한 청계천의 밤길을 걷기도 했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인 날, 나는 언 손을 비비며 수표교 아래에서 웅크렸다. 전태일 다리까지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달문이 왜 그토록 손해를 보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살리려 애썼는가를!

30만 명이 훌쩍 넘었던 18세기 한양 도성 안 거지 달문은 도시 최하층 빈민이었다. 도시 빈민은 세 가지 위험에 노출된다. 첫째는 굶주림. 종루의 거지들은 구걸을 못 하면 곧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농촌에서라면 다양한 구제책이 나오겠지만, 도성 안에선 특별한 길을 마련하기 어렵다. 둘째는 질병. 거리에서 자고 먹으니 각종 병을 차단할 방법이 없었다. 돌림병은 물론이고 가벼운 감기나 배탈도 치명상이기 십상이었다. 셋째는 범죄. 초가라도 있으면 대문과 방문을 굳게 닫아걸고 개인과 가족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달문처럼 노숙하는 이들에겐 도적이나 강도를 만나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표철주와 같은 주먹패에게 두들겨 맞고 음식과 재물을 빼앗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달문은 어려서부터 자신과 같은 도시 빈민들이 세 가지 위험에 빠져 다치거나 병들어 죽는 것을 목도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위험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지키고 그다음엔 가족을 지키고 그 다음에야 지인들을 지키려 한다. 모두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움직인다면 불행 자체를 막을 순 없다. 운이 좋아 나나 내 가족의 목숨은 건진다 해도, 내 이웃이 대신 끔찍한 불행을 당하는 것이다. 언젠가 불행이 벼락처럼 덮쳐오면 나 역시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리라. 이런 암담한 예측은 더욱더 사람을 이기적이고 비겁하게 만든다.

어린 달문도 처음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렸으리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운에 기대기보단 해결책을 모색했을 것이다.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공동체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행하는 것! 달문은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거나 무턱대고 손해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달문은 공동체를 위해 고통만 받진 않았다. 그는 또한 인생을 즐긴 자유인이었다. 철저하게 무소유로 일관한 그도 세 가지를 풍족하게 지닌 부자였다. 먼저 그는 시간 부자였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찾아온 이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펴도록 두곤 경청했다. 구걸 외엔 따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여유였다. 또한 그는 공간 부자였다. 생업을 위해 논밭이든 가게든 관청이든 얽매이는 보통 사람에 비해, 떠나고 싶으면 훌쩍 떠났고 머무르고 싶으면 무작정 머물렀다. 누구보다도 더 먼 곳까지 가봤고 또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고 울었으니, 풀어놓을 여행담도 크눌프처럼 많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 부자였다. 신분이나 학식, 취향에 따라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고, 누구든 오면 만나고 더불어 사귀었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선 무조건적 환대였다. 더러 사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기도 했지만 달문은 기꺼이 손해를 감내했다. 손해를 볼수록 그 이름이 높아졌다. 사랑을 할 땐 사랑만 생각하듯, 사람을 만날 땐 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만 집중했다. 달문을 만난 이들은 평생 달문을 잊지 못했다. 그리하여 달문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경계 없이 자유로웠다.

자고로 자유인의 언어는 춤이다. ‘은둔자’의 톱장이 사벨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도 달문처럼 춤꾼이었다. 그들은 먹물들의 현학을 비웃으며 온몸으로 인생을 노래했다. 추남 달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출 정도로 실력을 쌓았지만, 절뚝절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철괴무에 빠져들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풍속을 문란하게 만든 죄로 함경도에서 1년 동안 귀양을 살고 돌아왔을 때, 그도 59세의 늙은이였다. 그 몸으로 놀이판에 올라 철괴무를 추자 관객 모두 눈물을 쏟아냈다. 그 마지막 춤엔 미와 추, 빈과 부,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중심과 주변의 구분도 없는, 인생이란 단 한 번의 책을 채운 자의 지극한 자유로움이 깃들었다.

오간수교에서 뒤돌아 걸어 수표교에 이르렀다. 청계천을 걸을 때마다,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 잘살기 위해 책도 읽고 강연도 듣고 글도 쓴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사람과 달문이라는 좋은 사람 사이엔 무엇이 같고 다를까. 빠뜨린 것은 혹시 없을까.

김탁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