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에 장편소설 ‘빛의 과거’ 펴낸 은희경
“과거의 나, 다른 관점서 보면
현재의 나, 다른 내가 될수 있어
40년전과 현대 배경 설정한건
시간 다른 삶의 변주 보여주려”
통금 시간·추석 예매표 행렬 등
70년대 세밀한 묘사 추억 소환
“자신을 잘 안다”는 말은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잘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쌓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도전에 인색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 우리는 가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놀라는 경험을 한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게 되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에서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은희경 작가가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는 이 같은 질문에 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은 작가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빛은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온 빛인데,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같은 빛도 다르게 보인다”며 “우리의 삶도 과거를 재해석해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소설의 기본 구조는 주인공 ‘유경’이 1977년 여대 신입생 시절 기숙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 얽힌 다양한 사건을 2017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돌아보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대학 친구 ‘희진’이 자신의 시각으로 1977년을 기록한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가 끼어들며 세태소설 차원을 넘어선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경’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르게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돼 있다. ‘유경’이 생각하는 자신은 말더듬이란 사실이 들통나거나 난처해질 상황과 맞닥뜨릴 때 상처받지 않고자 회피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희진’이 묘사한 ‘유경’은 비겁하게 회피하고 가식과 허영에 찬 ‘공주’였다. 2017년의 ‘유경’은 서로 다르게 적은 1977년을 통해 자신의 비관적인 성격이 자신의 삶을 왜곡한 힘들을 폭력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부당함이라고 받아들이며 회피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닌지 자문한다. 뒤늦은 각성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은 작가는 “만약 ‘유경’이 ‘희진’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변화 없이 자신을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며 “과거의 나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현재의 나는 분명히 다른 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세밀하게 묘사된 1977년의 풍경이다. 은 작가가 묘사한 기숙사 통금 시간에 쫓겨 담을 넘는 학생들, 고속터미널의 추석 귀성표 예매 행렬, 대학야구 연맹전, 단체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싱어롱 다방, 제1회 대학가요제 등은 마치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다. 은 작가는 “1977년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로 세상과 본격적으로 대면하며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된 시기”라며 “40년 전과 현재를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긴 시간 차이를 두고 삶이 어떻게 변주되는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은 단순히 추억을 소환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군대 생활을 방불케 하는 기숙사 생활, 가정에서 벌어지는 딸과 아들의 차별, 남성보다 훨씬 낮은 여성 취업률,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는 세태 등 소설에 묘사된 당대의 불합리한 사회상은 40년 세월을 건너와 더욱 선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은 작가는 “독립유공자의 손자뿐만 아니라 손녀도 장손으로 인정한다는 뉴스를 보고 아직도 우리 사회의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누구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약자가 될 수 있는 만큼, 여성의 권익을 높이는 정책은 단순히 여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보험을 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소설 속에서 ‘희진’은 ‘유경’에게 소설을 쓰는 이유를 “외로워서”라고 말한다. 은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은 작가는 “소설을 쓰면 쓸수록 내가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앞으로 몸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다뤄보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