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5. 17. 23:16

 



매년 새해 첫날을 맞으면 습관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검색해 살핀다.
신춘문예 경쟁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비교될 만큼 치열하지만, 이후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벌이고 단행본까지 내는 당선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당선작을 훑어보며 나중에 어떤 작가가 살아남을지 예상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살아남아 단행본을 내면 반가운 기분이 든다.

2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탄광 폐쇄로 쇠락한 강원도의 소도시에서 역도 선수를 꿈꾸다가 포기하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바벨을 드는 일보다 버리는 데 의미를 두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앞으로 오래 보겠구나 싶었는데 내 예상을 넘어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어서 깜짝 놀랐다.
불과 등단 2년 만에 말이다.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씨가 말라가는 남성 작가라는 점 때문에 더 눈이 갔다.
첫 소설집 출간 소식을 접한 뒤 바로 주문을 넣고 책을 기다렸다.

역시나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등 몇몇 작품은 문예지를 비롯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구면인데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소설집에 실린 9개의 단편이 다루는 소재는 예능, OTT, 팬덤, 아이돌, 대중음악 등 무척 다채롭다.
작가는 이런 소재들을 교육, 노동, 차별 등 여러 사회 문제와 엮어 전방위로 다루는데 등장인물은 대체로 평범하고 우리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다룬 '팍스 아토미카' 같은 단편을 제외하면 거대한 서사도 없다. 

이래서 소설이 될까 싶은데 이 모든 요소가 빌드업해 기가 막히게 소설이 된다.
분명히 '지금' '여기'를 핍진하게 다루는 소설인데 질감이 기존의 '지금' '여기'를 다큐처럼 다룬 소설과 다르다.
현실을 비관이나 낙관으로 일관하지 않는 줄타기가 절묘하다.
사려 깊은데 연약하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지탱하는 H빔처럼 단단하고 힘이 있다.

소설집에 으레 달리는 해설은 진부했지만, '작가의 말'이 없어서 신선했다.
작품으로 말하면 충분하다는 태도일 테다. 
앞으로 작가를 정말 오래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소설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