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추천72 천선란 장편소설 <나인>(창비) 분량이 상당하지만 쑥쑥 읽히는 페이지터너여서 분량을 느끼기 어려웠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은 풍경이 눈앞에 그려져 즐거웠다. 들꽃 덕후인 내게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식물 묘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식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나도 자주 해봤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한 장르로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전공인 SF이기도 하고, 스릴러이기도 하고, 학원물이기도 하며, 성장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작인 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세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는데, 이 작품에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핵심 내용이어서 스포하지 않겠다)로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다. 작가는 청소년인 여러 등장인물의 눈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 2021. 11. 25.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지난 여름에 산 소설집인데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소설집에는 단편 11편이 실려 있는데, 대여섯 편은 이미 문예지나 앤솔로지 등을 통해 접한 작품이었다. 읽지 않은 작품은 정독하고 읽은 작품은 통독한 덕분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다가 자꾸 다른 책에 손을 대는 패턴을 끊을 수 있었다. 작가는 가족이나 주변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은 이들의 일상과 심리를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다. 작품 속에 죽음, 질병, 상실 등 온갖 비극적인 상황이 넘쳐나는데 희한하게도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어둡지 않다. 오히려 경쾌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특별하지 않은 사건이 특별하게 보이고, 특별한 사건을 특별하지 않게 보인다. 서사 전개에 큰 굴곡이 없고 문장이.. 2021. 11. 8. 박상영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문학동네) 내가 새 장편소설 집필을 위해 속초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펼친 책이다. 박상영 작가는 데뷔 때부터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소재인 퀴어 서사를 유쾌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나는 2년 전 문화일보 신춘문예 업무를 맡았을 때 퀴어 서사를 다룬 많은 응모작을 접수하며 작가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그만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 작가의 전작이 많은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성소수자의 사랑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이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대단히 재미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2000년대 초반의 학창시절은 내 경험한 90년대 중후반의 학창시절과 상당히.. 2021. 11. 6. 손홍규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문학사상) 목차부터 의미심장하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작품을 읽다 보면 첫 번째 날짜는 전봉준의 처형일자, 두 번째 날짜는 박헌영의 처형일자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 날짜와 네 번째 날짜는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임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이 작품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엮어냈다 작가는 방대하고도 치밀한 자료 조사 위에 자신만의 통찰을 더해 사건 속 죽음의 의미를 살핀다. 이 작품에서 네 죽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패'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박헌영은 북한에서 사회주의혁명에 실패해 숙청됐다. .. 2021. 9. 23.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