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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천명관 장편소설 『아코디언』(창비)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6. 9. 12.

 



작품의 주무대는 한국전쟁 이후 살아남기 위해 거리로 내몰린 어린 앵벌이들의 연명하는 서울의 거리다.
작가는 그 폐허 속을 헤집어 당대 서울의 남루한 풍경과 코를 찌르는 악취, 처참한 생존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밑바닥 삶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져 가슴이 답답하고 처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언젠가 소설을 읽고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는데, 어떤 작품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19세기 런던의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던 불우한 아동들의 초상이 전쟁 직후 서울의 거리 위로 겹치며 곳곳에서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도덕적 구원이나 극적인 인생역전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 견뎌야 하는 비극이 대책 없이 이어지고, 소설은 끝까지 비정한 밑바닥을 직시한다.

책을 덮으니 짙은 아쉬움이 밀려든다. 
천명관이라는 독보적인 체급을 가진 작가에게 기대한 것은 단순한 시대극의 재현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0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내놓은 장편소설이라면, 참혹한 과거를 사실적으로 복원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과거를 매개로 오늘날의 현실과 공명하는 지점을 제시해야 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앵벌이들의 비극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어떤 그늘과 연결되는지 보이지 않는다.

책 뒤표지는 아쉬움을 넘어 실망감을 남겼다.
어째서 이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해외 언론이 작가의 대표작 『고래』에 보낸 찬사로만 도배를 해놓았는가.
그리고 명색이 출판사가 출판사인데 아무리 초쇄여도 편집 과정에서 '일사분란'(213페이지) 같은 오타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