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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박상영 장편소설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래빗홀)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6. 9. 13.

 



작가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까지 전작을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그에 대한 신뢰는 견고한 편이다.
퀴어라는 소재를 특수한 영역에 가두지 않고 보편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정으로 끌어올리는 특유의 필력에 매번 감탄해 왔으니 말이다.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기지 않았던 작가이기에,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기업의 막전막후를 다룬 이 작품을 펼쳐 들 때의 기대감 역시 컸다.

작품은 실제 사건들과 기업사를 오버랩하며 생생한 현장감과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특히 작가의 드라마 각본 작업 경험이 반영된 듯한 시각적 구성은 시대극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내 소설을 맛보기로나마 드라마로 각색해 본 경험이 있기에, 작가가 대놓고 영상화를 노리고 썼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서사의 속도감과 몰입감, 재미라는 측면에서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 든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과연 이 변신이 성공적이었을까. 
작가의 이름을 지운 뒤 이 작품을 읽고 박상영의 작품이라 파악하기는 어려울 테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성 작가가 쓴 흔한 재벌 드라마 한 편을 다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이 소설의 사랑은 망해도 너무 망했다"라는 심은경 배우의 추천사를 읽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완독 후에는 추천사가 다르게 읽혔다.
서사 속 인물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전작들에서 느껴지던 작가 특유의 묵직한 서정성과 감정선도 거대한 사건의 속도감과 무게에 눌려 망가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평생 소설을 쓸 작가가 익숙한 주제에만 천착할 수는 없다.
낯선 영역으로의 도약은 필연적인 고민일 테다.
이 작품이 그런 고민의 과도기에 나온 시도라면 팬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