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까지 전작을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그에 대한 신뢰는 견고한 편이다.
퀴어라는 소재를 특수한 영역에 가두지 않고 보편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정으로 끌어올리는 특유의 필력에 매번 감탄해 왔으니 말이다.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기지 않았던 작가이기에,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기업의 막전막후를 다룬 이 작품을 펼쳐 들 때의 기대감 역시 컸다.
작품은 실제 사건들과 기업사를 오버랩하며 생생한 현장감과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특히 작가의 드라마 각본 작업 경험이 반영된 듯한 시각적 구성은 시대극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내 소설을 맛보기로나마 드라마로 각색해 본 경험이 있기에, 작가가 대놓고 영상화를 노리고 썼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서사의 속도감과 몰입감, 재미라는 측면에서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 든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과연 이 변신이 성공적이었을까.
작가의 이름을 지운 뒤 이 작품을 읽고 박상영의 작품이라 파악하기는 어려울 테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성 작가가 쓴 흔한 재벌 드라마 한 편을 다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이 소설의 사랑은 망해도 너무 망했다"라는 심은경 배우의 추천사를 읽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완독 후에는 추천사가 다르게 읽혔다.
서사 속 인물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전작들에서 느껴지던 작가 특유의 묵직한 서정성과 감정선도 거대한 사건의 속도감과 무게에 눌려 망가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평생 소설을 쓸 작가가 익숙한 주제에만 천착할 수는 없다.
낯선 영역으로의 도약은 필연적인 고민일 테다.
이 작품이 그런 고민의 과도기에 나온 시도라면 팬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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