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27 정유정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 데이터로 만든 기억과 정신을 온라인 세계로 옮겨 육신 없이 영생하는 세상.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쓰인 매력적인 소재다. 나 역시 「시간을 되돌리면」이라는 단편소설로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이 같은 SF소재에 작가의 주특기인 스릴러를 엮은 하이브리드다. 솔직히 뻔하고 흔한 소재다. 뻔하고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육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 세계 '롤라'의 등장이 임박하고, '롤라' 행 티켓이 유심 형태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찾으려는 자, 거래하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 2024. 9. 11. 김혜나 산문집 『술 맛 멋』(은행나무) 산문집 두 권을 출간한 경력이 있고, 내년에도 새로운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 보니, 산문집을 쓸 때 고충을 나름 안다. 어떤 산문집이든 주제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산문집의 주제는 술이다. 명확한 주제다. 주제가 명확할수록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주제에 관한 지식과 정보 제공이 앞서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고, 지나치게 감상만 늘어놓으면 글이 느끼해져 소화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기대했다. 작가가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써 왔던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술에 관해 조예가 깊은 프로페셔널(내눈에는 그렇다)이니까. 이런 교집합을 가진 작가는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단 한 명뿐이다. 읽은 소감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말모'다. 몰랐던 훌륭한 우리 술 위에 국내외 문학 명작이.. 2024. 8. 31. 박서련 장편소설 『폐월; 초선전』(은행나무)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중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는 '초선' 아닐까.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판짜기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는 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다. 초선은 남성 호르몬으로 가득 찬 『삼국지연의』의 초반을 주도하는 여성 캐릭터이지만, 이후 행적은 캐릭터의 무게감에 맞지 않게 묘연하다. 박서련 작가는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작가다. 등단한 지 10년이 안 됐는데, 그사이에 내놓은 단행본 수가 10개가 넘는다. 무시무시한 생산력이다. 그만큼 쓸 이야기도 많고, 관심사도 다양하다는 방증이다. 작가가 메가 임팩트만 남기고 빠르게 『삼국지연의』에서 퇴장한 초선에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사도 왕윤의 명을 받아 연환계.. 2024. 7. 11. 최유안 장편소설 『새벽의 그림자』(은행나무) 작가는 지금까지 소설로 다뤄졌을 법한데 다뤄지지 않은 소재로 자기 영역을 개척해 왔다. 여성 직장인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일과 직장의 의미를 물었던 장편소설 『백 오피스』,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전문직 여성의 고뇌를 담은 연작소설 『먼 빛들』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최근에는 소설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통일과 탈북자 문제에 주목했다. 시베리아 벌목장을 배경으로 다룬 장마리 작가의 장편소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외에는 같은 주제를 다룬 최근작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최근 한국 문학에선 낯선 주제다. 아무래도 청년세대에게 잘 와닿지 않는 문제라는 게 소설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유일 테다. 남북이 갈라져 사실상 다른 나라로 자리잡은 지 70년이 넘었다. 청년세대는 북한을 가끔 미사일을 쏘거나 오.. 2024. 7. 2.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