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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30

김의경 소설집 『두리안의 맛』(은행나무) 이 소설집을 읽고 이런저런 문장을 주저리주저리 쓰다가 모두 지웠다. 그 어떤 해설도 사족인 소설집이다. 읽는 내내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기자 흉내를 내보겠다. 대한민국 보통 청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기획 기사 작성 때문에 통계에 익숙한 편이다. 통계를 살피면 디테일한 부분은 놓칠지 몰라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그릴 순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의 하나는 돈의 흐름을 살피는 거다. 대한민국 보통 청년의 모습을 살피려면 그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통계를 살피면 된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 기업 중 99%가 중소기업이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 취업자는 전체 취업자의 89.0%를 차지하고, 그들의 월 평균소득은 약 298만.. 2025. 6. 7.
정덕시 장편소설 『거미는 토요일 새벽』(은행나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운 반려동물은 언젠가부터 생태계 교란종으로 취급받는 붉은귀거북 세 마리였다. 내 의지로 키우기 시작한 거북은 아니었다. 1995년 초쯤 동생이 어머니를 졸라 시내에 있는 수족관에서 거북이를 샀다. 내 기억으로 마리당 2000원이었고, 작은 플라스틱 어항은 5000원, 사료는 한 봉지에 1000원이었다. 동생은 거북이에게 관심은 쏟은 기간은 처음 며칠뿐이었다. 어항은 곧 거북이의 똥과 사료 찌꺼기 때문에 지저분해졌는데, 동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다간 거북이들이 다 죽겠다 싶었다. 나는 동생에게 그럴 거면 거북이를 내게 넘기라고 말했다. 동생은 미련 없이 내게 어항을 통째로 넘겼다. 그게 거북이 키우기의 시작이었다. 키우는 동안 거북이들이 개체별로 성격이 모두 다를 뿐만.. 2025. 6. 3.
전민식 장편소설 『길 너머의 세계』(은행나무) '수목장'이라는 흔치 않은 공간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은 저마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채 '수목장'이라는 직장에 모여 인연을 맺는다. 같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가깝고도 멀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하게 여기는데, 굳이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하지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여서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면 누구보다 끈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런 관계로 시작한 세 주인공이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면서 깊은 유대 관계를 쌓는 과정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끝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수목장 사장, 늦은 밤에 종종 벌어지는 암장, 비극적이면서도 의문이 가득한 죽음... 이렇게 말하니 무슨 범죄 소설.. 2025. 5. 22.
정유정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 데이터로 만든 기억과 정신을 온라인 세계로 옮겨 육신 없이 영생하는 세상.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쓰인 매력적인 소재다. 나 역시 「시간을 되돌리면」이라는 단편소설로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이 같은 SF소재에 작가의 주특기인 스릴러를 엮은 하이브리드다. 솔직히 뻔하고 흔한 소재다. 뻔하고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육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 세계 '롤라'의 등장이 임박하고, '롤라' 행 티켓이 유심 형태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찾으려는 자, 거래하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 2024.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