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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30

서정주 시집 <귀촉도>(은행나무)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입까지 벌어지게 하는 시를 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재능일까. 힙합에 전혀 감흥을 못 느꼈던 내가 이센스의 첫 정규앨범 [The Anecdote]를 듣고 뻑갔던 것처럼, 서정주의 시집은 읽을 때마다 이런 게 '악마의 재능'이구나 싶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견우의 노래) 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다수굿이 젖어 있는 붉고 흰 목화꽃은,/누님/누님이 피우셨지요?(목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뭐라 하느냐/너무 앞에서/아- 미치게/짙푸른 하늘.(소곡) 2024. 5. 10.
김하율 장편소설 <어쩌다 노산>(은행나무) 저출산을 우려하는 뉴스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이 문제는 기혼자와 미혼자를 나눠 판단해야 한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혼인 대비 출산 비율은 1.3명이다. 2023년 합계 출산율 0.72명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많다. 통계로 확인할 수 있듯이 기혼자는 여전히 아이를 낳으려는 경향이 크다. 다만 만혼 비율이 매년 높아지다 보니 과거보다 난임 부부와 노산이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작품은 그중 노산에 관해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계획하지 않았던 둘째 아이를 갖게 된 작가의 경험담을 그린다. 주인공 이름이 대놓고 작가 본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늦게 결혼해 난임 전문 병원에 다니며 어렵게 첫째를 가졌는.. 2024. 4. 25.
김혜나 중편소설 <그랑주떼>(은행나무)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 2024. 4. 14.
윤고은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행나무) 배달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무명 화가가 느닷 없이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제안한 곳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국의 한 재단인데, 어이없게도 재단의 주인이 '로버트'라는 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개다. 犬. DOG. 멍멍이. '로버트'가 무명 화가의 그림을 '픽'했단다. 대신 조건은 하나, 지원받아 완성한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가 정한다. '로버트'가 '픽'해 작품을 소각 당한 작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고, 해당 작가의 작품 가격은 큰 폭으로 뛰어오른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개의 안목이 정말 정확할까? 개의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과 기계가 있다지만, 작가와 개가 정말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건가? 읽기 전부터 호기심.. 2023.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