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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411

이유리 소설집 『비눗방울 퐁』(민음사) 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읽고 느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익숙한데 낯설며, 웃기면서도 슬프고, 경쾌하나 우울한... 어렵지만 형용사 하나로 그때 느낀 기분을 요약하자면 '명랑하다' 정도 되겠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읽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의 모음이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정말 부러운 작가다. 국내 작가 중에서 이 정도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정은 데뷔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슬픔과 우울함의 농도가 조금 짙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집에 담긴 여덟 작품 대부분이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고 있기.. 2025. 5. 29.
단요 장편소설 『피와 기름』(래빗홀) 제동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선로를 바꾸면 그들은 살지만, 바뀐 선로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죽는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꾸는 손잡이가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텐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윤리 관점에서 바라본 '트롤리 딜레마'다. 비슷한 문제를 내보겠다. 눈앞에 보이는 소수를 살리기 위해 전 인류를 지옥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 일인가. 당신에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할 텐가. 이 문제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 2025. 5. 23.
정명섭 소설 『조종자』(꿈꾸는섬) 핵전쟁으로 자멸한 인류는 지구 대신 갈아탈 새로운 행성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도망친 곳에는 천국도 낙원도 없다지 않은가.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 새로운 세계에서도 인류는 서로 반목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지의 괴물들이 살아남은 인류를 공격해 위기에 빠트린다.그런데 일부 괴물이 인류를 보호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필립 와일리의 SF 소설 『지구의 마지막 날(When Worlds Collide)』이 더 보여주지 않은 미래 세계(다만 비관적인)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주인공이 더해지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극단적인 기.. 2025. 5. 22.
전민식 장편소설 『길 너머의 세계』(은행나무) '수목장'이라는 흔치 않은 공간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은 저마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채 '수목장'이라는 직장에 모여 인연을 맺는다. 같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가깝고도 멀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하게 여기는데, 굳이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하지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여서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면 누구보다 끈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런 관계로 시작한 세 주인공이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면서 깊은 유대 관계를 쌓는 과정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끝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수목장 사장, 늦은 밤에 종종 벌어지는 암장, 비극적이면서도 의문이 가득한 죽음... 이렇게 말하니 무슨 범죄 소설.. 2025.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