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331 김보영 연작소설 <종의 기원담>(아작) "걸작이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다.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이후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한국 SF다. 이 작품은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가 로봇인 세상을 배경으로 살아있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를 철학한다. 작품 속에서 로봇은 당연히 자신을 생물이라고 여기고,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오염된 환경이 로봇에겐 최적의 환경이며, 산소와 유기물질은 로봇에게 위협이 되는 오염원이다. 지금 우리가 생존 문제라고 여기는 게 과연 다른 종에게도 문제일까? 작품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로봇의 시선과 심리를 집요하게 쫓으며 자아와 생존을 고민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모조리 뒤집어서 낯선 세상을 보여주는데, 그 세상이 낯설지 않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감탄했다. 로봇.. 2024. 4. 17. 이도형 장편소설 <국회의원 이방원>(북레시피) 한국 역사상 유일한 역성혁명을 주도한 혁명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 출신 관료, 형제는 물론 처가와 사돈까지 도륙 낸 냉혈한, 아들이 성군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명군. 조선 태종 이방원이 오랫동안 꾸준히 다양한 콘텐츠로 다뤄진다는 건 그만큼 그가 흥미롭고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방증일 테다. 만약 이방원이 대한민국에 부활해 정치인으로 활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작품은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다양하게 뻗어나간다. 작가가 오랫동안 정치부에서 일했던 일간지 기자 출신인 만큼 디테일이 좋다. 다양한 취재 경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었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지면 매력적일 작품이다. 2024. 4. 16. 김나현 소설집 <래빗 인 더 홀>(자음과모음) 이 소설집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 일하는 사람들이고 위태로우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이렇게 말하니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 노동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일하는 사람의 일상을 그리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진 않는다. 환상을 현실과 뒤섞어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을 수시로 연출하는데, 그런 연출이 현실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어쩔 땐 지독하게 핍진한데, 어쩔 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던져지면 소설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2024. 4. 16. 김혜나 중편소설 <그랑주떼>(은행나무)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 2024. 4. 14. 이전 1 2 3 4 ··· 8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