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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33

나재필 산문집 <나의 막노동 일지>(아를)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아온 중년 남자가 준비 없이 사표를 던졌다. 평기자 시절에는 굵직한 기자상을 많이 받았고, 데스크를 거쳐 '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에도 앉아봤다. 사실상 떠밀리듯 낸 사표였지만, 살아오면서 나름 콧방귀를 뀌어봤으니 나오면 어떻게든 살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이 든 청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용직 알바와 식당 주방보조를 전전하며 재취업을 시도한 끝에 도착한 곳은 막노동 현장이었다. 막노동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 형태이지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가 막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테다. 이른바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노동 현장은 마치 인생 막장인 사람들이 모인 곳.. 2023. 11. 12.
박상영 산문집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인플루엔셜)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남 부럽지 않게 많은 곳을 여행해 본 작가의 좌충우돌 여행기. 박상영 작가는 소설을 재미있게 잘 쓰지만 산문도 정말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다. 박 작가의 산문을 보면 자학과 자뻑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귀여운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이 산문집에 실린 글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글이 '밀리의 서재'를 통해 먼저 접한 구면이지만, 책으로 묶여 실리니 읽는 맛이 또 다르다. 각을 잡고 읽지 않아도 휴식 같은 산문집이다. 독자를 자연스럽게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유머러스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그걸 읽고 깨달으면서도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하는 걸 보니, 유머는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는 모양이다. 여러모로 부러운 작가다. 2023. 9. 17.
한소범 산문집 <청춘유감>(문학동네) 작가는 언론계는 물론 출판계에서 소문난 문학기자였고, 그 소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언론사는 보통 중견 기자를 문학 담당 기자로 배치한다. 그만큼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자리에 나이 서른도 안 된 젊은 기자가 불과 몇 년 만에 업계가 인정하는 훌륭한 문학기자가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김훈 선생님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보통 사건이 아니다. 하필 나는 짧았던 문학기자 시절에 작가와 함께 필드에서 뛰었다. 그리고 백전백패였다. 내가 그 시절에 가장 많이 참고한 기사는 작가가 쓴 한국일보 기사였다. 부지런하고, 관심사가 넓었으며, 이슈의 핵심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했고, 무엇보다도 기사를 참 잘 썼다. 이러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있나. 그렇게 작가는 현재 대한민국 출판, 문학 시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자.. 2023. 6. 30.
수상한커튼 산문집 <다시, 아마추어>(모로북스) 작가는 오랫동안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 강사로 활동해 온 베테랑 뮤지션임과 동시에, 나이 들어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아마추어 연주자이기도 하다. 아마추어를 가르치는 입장과 아마추어로서 배우는 입장을 오가며 진솔하게 자기 경험을 털어놓는다. 실력이 극적으로 늘지 않아도 좋으니, 느려도 함께 배우는 게 즐겁고 오래 간다고 손가락 힘이 세다고 F코드를 누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코드를 누르는 손가락 근육과 일상 생활에 쓰이는 손가락 근육은 다르다고. 연습하다가 막히면 그냥 기타를 들고만 있어도 좋다고. 가능한 한 힘을 빼라고. 이 산문집을 읽으며 내가 경험했던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여 기타 코드를 바꾸던 첫 순간. F코드를 잡았을 때 처음으로 맑은 소리를 냈던 순간. .. 2023.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