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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소설83

이혁진 장편소설 <광인>(민음사) 이 작품이 2023년에 읽는 마지막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러모로 놀라운 소설이다. 작가가 장편소설 로 데뷔했을 때, 이제 한국 문학계에도 이렇게 훌륭한 기업소설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된 작가의 출세작 를 읽었을 땐 섬세한 연애담과 감정선을 현실과 기막히게 엮어 기업소설의 범위를 넓히는 필력을 보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나는 작가를 기본적으로 사회파 소설가로 여겨왔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치명적인 연애소설을 써서 내놓을 줄은 몰랐다. 이 작품은 돈에 미쳐 살아온 남자 '해원', 위스키 제조에 미친 여자 '하진', 음악에 미친 남자 '준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마침내 미워하고 증오하며 광기로 물들고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처럼 그야말로 미친 .. 2023. 12. 29.
김하율 장편소설 <이 별이 마음에 들어>(광화문글방) 1978년 대한민국 서울에 불시착해 여공으로 살아가는 외계인. 설정만으로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롭지 않은가. 설정만 보면 SF스럽지만, 이 작품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요즘에 어떤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소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읽기에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경쾌하고, 심지어 웃기다. 주인공이 떠나온 행성의 생존 매뉴얼에 따르면,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 행성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로 변신하기다. 하필 주인공이 맨 처음 마주친 고등 생명체는 여공이었고, 주인공은 가장 평균적인 모습을 가진 여공으로 변신해 공장에 스며든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그야말로 미친 학습 능력을 발휘해 말도 안 되는 단기간에 시다, 미싱사를 거쳐 .. 2023. 12. 10.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래빗홀) 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이나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 2023. 12. 8.
은모든 장편소설 <한 사람을 더하면>(문학동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전 총리 같은 독재자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에 등장하는 '피의 그믐날'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이 작품 속 대한민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몇 차례 더 벌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적당히' 무너진 세상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계란 한 알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거보다 열악한데, 디스토피아라고 부르기엔 뭔가 하찮다. 천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 천천히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낮은 출생률은 더 낮아지고 노년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독신세 부담을 점점 늘린다. 이 같은 설정을 소설로만 .. 2023.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