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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장편소설 『구름 사람들』(문학동네) 작가의 전작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조금은 당혹스러운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반면 이 작품은 환상보다는 현실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고, 결말도 예상 범위 내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기발한 엉뚱함이 유쾌한 해방감을 주었다면, 작가의 첫 장편인 이 책은 다소 무겁고 비극적이다. 하늘에 정체불명의 오염물질로 만들어진 분홍빛 구름이 떠있다는 설정은 작가의 전작들을 연상케 하지만, 거기에 모여 사는 거주자들의 삶은 전형적인 빈민가의 모습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거주지는 아파트이고, 대체로 층수가 높아질수록 시세도 높아진다. 특히 꼭대기 층인 펜트하우스는 아파트 단지에서 예외 없이 최고가를 자랑한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뒤집어 펼쳐낸다. 반지하나 지하는커녕 .. 2026. 8. 13.
류현재 장편소설 『빼그녕』(마름모)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 홍보 게시물을 접했을 때, 내심 가벼운 성장소설일 것이라 예상했다. 표지 디자인은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이고, 주인공은 소녀이니까. 하지만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성장소설의 면모를 분명히 갖추고 있지만,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빼그녕(본명 백은영)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들은 모든 걸 기억하는 비범한 천재 소녀다. 어른들의 위선을 포착해 내는 조숙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 속 주인공 ‘진희’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빼그녕이 진희보다 훨씬 아이답고, 엉뚱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이런 아이를 1인칭 시점으로 활용한 만큼 작품 분위기는 거.. 2026. 8. 13.
장강명 장편소설 『서성이다』(현대문학) 책을 펼친 자리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못했다. 작가 특유의 냉철한 가독성과 속도감은 여전한데, 그 위에 아픈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니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폭발력이 어마어마하다. 서사를 끌어가는 문체는 서늘한데, 그 깊은 밑바닥에 흐르는 진심은 뜨겁다. 주인공의 진심이 드러날 때마다 서서히 가슴을 옥죄어왔고, 마지막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작가 개인의 서사를 아는 독자라면 더더욱 심장박동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많은 책을 읽진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울렁거리게 한 책이었다. 타인의 문장을 통해 나의 가장 은밀하고 취약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당혹스러우면서도 묵직한 충격을 준다. 언젠가 아내는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2026. 8. 10.
조영주 장편소설 『마지막 방화』(한겨레출판) 사건 해결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방화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형사라니. 마치 지리산 중턱에 광어회 맛집이 존재한다는 설정처럼 신선하고 흥미롭다. '셜록 함즈'라는 거창한 별명이 무색하게, 스스로의 무의식과 죄책감마저 의심해야 하는 주인공의 역설적인 상황이 극의 긴장감을 바짝 조여온다. 여기에 경기도 평택시라는 일상적인 공간과 촉법소년, 층간소음 갈등, 청소년 마약 문제, 전세 사기 등 우리가 뉴스로 자주 접하는 분통 터지는 사회적 이슈가 결합해 현장감을 더한다. 뉴스 헤드라인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이 지극히 현실적인 범죄들은 소설의 몰입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실체를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이 끼어드니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칠 수가 없다. 마치 틀린 수학 문제를.. 2026. 8. 10.
김동하 장편소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네오픽션) 어느 날 느닷없이 그림자를 내어주면 고통스러운 기억과 슬픔을 지워주겠다는 '그림자 상인'이 등장한다. 그까짓 그림자를 내어주고 고통과 슬픔을 잊을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 이 작품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 거래를 받아들여 그림자를 잃고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일까. 소설은 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이 달콤한 거래 뒤에 숨겨진 서늘한 진실을 파헤친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참된 기쁨조차 느끼지 못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슬픔을 지워낸 자리에 온전한 행복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한 축이 통째로 붕괴해 버린다는 사실이 .. 2026. 8. 8.
이순임 장편소설 『럼과 라즈베리』(파람북) 서사보다는 감각이 전면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평형모래 없이 태어나 세상의 미세한 파동과 저주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가족의 부재와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겪는 주인공이 예민한 청각 때문에 세상 모든 사물을 다양한 주파수로 감지하며 겪는 심리 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이 작품이 정확히 어떤 사건 중심의 이야기를 전개했는지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기억이 희미하다. 대신 작가는 감정의 리듬에 따라 문장 길이를 변주하고 다양한 소리를 동기로 활용한다. 서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자리에 감각적인 텍스트를 둔다. 융의 분석심리학이나 존재의 연결성을 뜻하는 철학적 상징들이 서사를 대신에 텍스트를 연결하는 끈이다. 소리와 냄새가 이미지로 남아 그림자처럼 떠도는데, 이 작품의 표지.. 2026. 8. 8.
최현미 저 『읽는 여성의 역사』(어크로스) 인류 역사 속에서 여성이 읽기를 통해 자신을 비롯해 세상을 어떻게 바꿔왔는지 연대기 순으로 살피는 책이다. 저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텍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저자로서의 권위와 정체성을 확실히 주장한 인물이 여성이었음을 명확한 근거로 밝히고,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을 지나 조선 시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공간에 존재했던 '읽는 여성'을 하나하나 뒤쫓아 나간다.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사제 엔헤두안나부터 세헤라자데, 『겐지 모노가타리』에 열광한 일본의 소녀 독자, 살롱을 만들어 지성을 불러들였던 프랑스 여성, 브론테 자매와 버지니아 울프에 이르기까지 '읽는 여성'의 발자취가 얼마나 깊고 눈부신지 조명한다. 저자는 가부장제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성의 독서를 오랫동안 '위험하고 불온한 행위'.. 2026. 8. 8.
임지형 장편소설 『연희동 러너』(상상스퀘어) 7612번 연두색 버스, 홍남교 정류장, GS편의점, 서대문구행복그린센터, 그리고 홍제천 등 눈에 익은 지명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지난해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석 달을 머물며 매일같이 스쳐 지나갔던 익숙한 공간들이라 글을 읽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어찼다. 소설 속 주인공 연희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다가, 우연히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비로소 나만의 호흡과 속도를 찾아간다. 이 소설의 연희처럼 온몸을 던져 달리기까지는 아니었지만, 20대 말 여러 이유로 방황하고 불안했던 내게도 청계천을 걷는 시간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치유였다. 당시 나는 며칠 동안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몸을 미치도록 피곤하게 만들면 까무러치듯 잠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에, 살.. 2026. 8. 8.
황석영 장편소설 『할매』(창비) 수백 년을 살아온 팽나무를 중심으로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연대기순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임에도 전반부와 후반부가 주는 호흡이 완전히 달라, 마치 전혀 다른 두 권의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초반부에 펼쳐지는 자연 풍경 묘사가 압도적이다. 미문과 거리가 먼 담백한 문장인데도 묘사의 스케일이 웅장하고 넓었다. 페이지를 쉽게 넘기지 못하고 오래 눈을 멈출 때가 많았다. 특히 새를 다룬 서사 대목에선 괜히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그 압도적인 묘사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이미 책값은 아깝지 않다. 다만 후반부는 전작들을 떠올려볼 때 아쉬움이 남는다. 얇은 두께에 비해 다루는 시간 범위와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주목하기 보다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데 .. 2026.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