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024

박상영 장편소설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래빗홀) 작가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까지 전작을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그에 대한 신뢰는 견고한 편이다. 퀴어라는 소재를 특수한 영역에 가두지 않고 보편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정으로 끌어올리는 특유의 필력에 매번 감탄해 왔으니 말이다.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기지 않았던 작가이기에,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기업의 막전막후를 다룬 이 작품을 펼쳐 들 때의 기대감 역시 컸다. 작품은 실제 사건들과 기업사를 오버랩하며 생생한 현장감과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특히 작가의 드라마 각본 작업 경험이 반영된 듯한 시각적 구성은 시대극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내 소설을 맛보기로나마 드라마로 각색해 본 경험이 있기에, 작가가 대놓고 영상화를 노리고 썼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26. 9. 13.
천명관 장편소설 『아코디언』(창비) 작품의 주무대는 한국전쟁 이후 살아남기 위해 거리로 내몰린 어린 앵벌이들의 연명하는 서울의 거리다. 작가는 그 폐허 속을 헤집어 당대 서울의 남루한 풍경과 코를 찌르는 악취, 처참한 생존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밑바닥 삶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져 가슴이 답답하고 처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언젠가 소설을 읽고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는데, 어떤 작품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19세기 런던의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던 불우한 아동들의 초상이 전쟁 직후 서울의 거리 위로 겹치며 곳곳에서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도덕적 구원이나 극적인 인생역전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2026. 9. 12.
소향 장편소설 『모방소녀』(텍스티) 사건 전개가 대단히 빠르고 적재적소에 배치된 반전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잘 만든 서스펜스 드라마를 보듯 머릿속에 시각적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펼쳐져,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읽을 수 있었다.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학벌지상주의다.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드라마 을 떠올리게 되지만,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학부모가 아닌 '학생'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 시선의 재미를 안겨준다.그렇다고 이 작품의 매력이 속도감과 재미에만 머물지는 않는다.누군가를 모방하는 자와 그 모방의 대상이 되는 자 사이의 심리를 대조하는 묘사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결핍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비틀어놓는지, 보여지는 삶에 집착하는 태도가 영혼을 어떻게 좀먹어 들어가는지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대단히 예리하다.작중 인물 중.. 2026. 9. 11.
김호연 장편소설 『서울의 선인』(위즈덤하우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다분히 종교적이거나 오컬트적인 요소를 다룬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초반부에는 미스터리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은근히 자아내며 의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유발한다. 그러나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역시나 특유의 유쾌하고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김호연 표' 소설로 차분히 귀환한다. 전작들처럼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에 서울 곳곳을 포착해 낸 현장감이 더해졌다. 초반부에 치밀하게 깔아놓은 복선들을 후반부에 모두 자연스럽게 회수하여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전개도 여전하다. 작가의 전작 『망원동 브라더스』와 『파우스터』를 뒤섞어 놓으면 이 작품의 결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불편한 편의점』이나 『나의 돈키호테』처럼 처음부터 따스하고 다정한 분위기만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펼쳤.. 2026. 9. 11.
문지혁 장편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이 작품을 읽는 내내 17년 전 여름에 걸었던 1번 국도를 떠올렸다. 작품 속 주인공은 유럽 여러 나라의 도시를 넘나들지만, 나는 며칠 동안 1번 국도를 걸으며 몇몇 지자체의 경계만을 겨우 넘었다. 주인공에게는 여러 동행이 있었지만, 내겐 동행이 없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여행'이라는 키워드뿐이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1번 국도를 걸었던 그 지난한 여행이 내가 소설을 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실연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모호한 상처를 안고 떠난 주인공은 여행을 통해 내면을 정리하려 하지만,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 의도치 않게 여러 사람과 얽히는 동안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의 진짜 얼굴과 대면한다. 내가 1번 국도의.. 2026. 9. 4.
이유리 장편소설 『구름 사람들』(문학동네) 작가의 전작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조금은 당혹스러운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반면 이 작품은 환상보다는 현실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고, 결말도 예상 범위 내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기발한 엉뚱함이 유쾌한 해방감을 주었다면, 작가의 첫 장편인 이 책은 다소 무겁고 비극적이다. 하늘에 정체불명의 오염물질로 만들어진 분홍빛 구름이 떠있다는 설정은 작가의 전작들을 연상케 하지만, 거기에 모여 사는 거주자들의 삶은 전형적인 빈민가의 모습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거주지는 아파트이고, 대체로 층수가 높아질수록 시세도 높아진다. 특히 꼭대기 층인 펜트하우스는 아파트 단지에서 예외 없이 최고가를 자랑한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뒤집어 펼쳐낸다. 반지하나 지하는커녕 .. 2026. 8. 13.
류현재 장편소설 『빼그녕』(마름모)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 홍보 게시물을 접했을 때, 내심 가벼운 성장소설일 것이라 예상했다. 표지 디자인은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이고, 주인공은 소녀이니까. 하지만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성장소설의 면모를 분명히 갖추고 있지만,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빼그녕(본명 백은영)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들은 모든 걸 기억하는 비범한 천재 소녀다. 어른들의 위선을 포착해 내는 조숙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 속 주인공 ‘진희’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빼그녕이 진희보다 훨씬 아이답고, 엉뚱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이런 아이를 1인칭 시점으로 활용한 만큼 작품 분위기는 거.. 2026. 8. 13.
장강명 장편소설 『서성이다』(현대문학) 책을 펼친 자리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못했다. 작가 특유의 냉철한 가독성과 속도감은 여전한데, 그 위에 아픈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니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폭발력이 어마어마하다. 서사를 끌어가는 문체는 서늘한데, 그 깊은 밑바닥에 흐르는 진심은 뜨겁다. 주인공의 진심이 드러날 때마다 서서히 가슴을 옥죄어왔고, 마지막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작가 개인의 서사를 아는 독자라면 더더욱 심장박동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많은 책을 읽진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울렁거리게 한 책이었다. 타인의 문장을 통해 나의 가장 은밀하고 취약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당혹스러우면서도 묵직한 충격을 준다. 언젠가 아내는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2026. 8. 10.
조영주 장편소설 『마지막 방화』(한겨레출판) 사건 해결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방화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형사라니. 마치 지리산 중턱에 광어회 맛집이 존재한다는 설정처럼 신선하고 흥미롭다. '셜록 함즈'라는 거창한 별명이 무색하게, 스스로의 무의식과 죄책감마저 의심해야 하는 주인공의 역설적인 상황이 극의 긴장감을 바짝 조여온다. 여기에 경기도 평택시라는 일상적인 공간과 촉법소년, 층간소음 갈등, 청소년 마약 문제, 전세 사기 등 우리가 뉴스로 자주 접하는 분통 터지는 사회적 이슈가 결합해 현장감을 더한다. 뉴스 헤드라인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이 지극히 현실적인 범죄들은 소설의 몰입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실체를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이 끼어드니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칠 수가 없다. 마치 틀린 수학 문제를.. 2026.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