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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34

김홍 장편소설 <프라이스 킹!!!>(문학동네) 문장과 이야기에 작가의 지문이 찍혀 있는 듯한 소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다. 여러 소설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뜯어와서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몰라도 김홍 작가의 작품은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마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처럼.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장사꾼, 베드로를 모시는 무당, 어떤 선거도 53%의 승률로 승리하게 해주는 성물 등. 이 작품 역시 기상천외한 등장인물과 소재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팔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기꺼이 구해주겠다는 장사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전개가 실소를 터트리게 하다가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함의가 무거워 .. 2024. 4. 14.
장강명 산문 <미세 좌절의 시대>(문학동네) 꽤 많은 글이 구면이어서 반가웠다. 가장 공감하며 읽은 글은 '제정신으로 살기 위하여', '불편함이 도덕의 근거가 될 때', '나는 왜 보수주의자인가', '대한민국 주류 교체와 두 파산', '저출생 대책을 넘어서' 등이었다. 작가는 편을 가르는 선동만 넘쳐나는 현상에 관해 우려하고, 우리 사회에 도덕적 감수성이나 공감 능력보다 합리적 이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반대 진영을 제거 대상으로 보는 극단적인 시각을 경계한다. 보수를 현실주의라고 보는 작가의 시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읽고 "맞아 맞아!"라며 동의하는 독자도 많고, 불편함을 느낄 독자도 많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뭔가 반박하고 싶긴 한데, 논리적으로 반박할 게 마땅치 않아서 식식대지 않을까 싶다. 상식적인 시각으로 상식적인 논리를 담.. 2024. 4. 5.
정세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중에서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를 한 명만 꼽자면 정세랑 작가를 꼽겠다. 같은 장르 소설은 물론 같은 성장소설, 처럼 현대사와 여성 서사를 훌륭하게 엮은 장편소설까지. 특히 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한국 소설을 통틀어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다루고 심지어 잘 쓰는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짜증 날 때가 많다. 물론 질투 섞인 칭찬이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진심으로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작가인데, 역시 예상치 못한 장르의 소설로 뒤통수를 친다. 역사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다룬. 이 작품은 당나라 유학파 출신인 육두품 가문 남장여자가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 2023. 12. 19.
은모든 장편소설 <한 사람을 더하면>(문학동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전 총리 같은 독재자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에 등장하는 '피의 그믐날'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이 작품 속 대한민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몇 차례 더 벌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적당히' 무너진 세상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계란 한 알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거보다 열악한데, 디스토피아라고 부르기엔 뭔가 하찮다. 천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 천천히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낮은 출생률은 더 낮아지고 노년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독신세 부담을 점점 늘린다. 이 같은 설정을 소설로만 .. 2023.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