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부의 뭉클함, 후반부의 서늘함...
신경림 시인의 시집이 이번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사진관집 이층신경림 지음창비 |
시어로 재현된 아득하고 뭉클한 추억
약자편에 서서 서늘하게 바라본 현실
詩歷이 빚어낸 묵직한 절창 감동이…
대가의 마지막 작품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남다르다. 그 작품이 대가의 생애 최고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은 대가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가장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믿고, 그 작품에 깃든 대가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애를 쓴다. 매해 연말이면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에 귀를 기울이듯이 말이다. 인간에게 목숨보다 절실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경림(79) 시인이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출간했다. 지난 2008년 ‘낙타(창비)’ 이후 6년 만의 신작이다. 이제 막 새롭게 시집을 내놓은 노시인에게 마지막 작품을 운운하는 것은 무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이한 시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새로운 시집 출간을 향한 축복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이 말미에 남긴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시집엔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윤무(輪舞)’ ‘두메양귀비’ ‘유성(流星)’ 등 총 53편의 시가 4부에 걸쳐 실려 있다. 시집 속 시의 성격은 큰 틀에서 시인의 과거를 추억하며 되새김질하는 1ㆍ2부와 비틀린 현실을 직시하며 소외된 이들의 풍경을 그려내는 3ㆍ4부로 나뉜다.
1ㆍ2부에서 시어로 재현된 시인의 추억은 기교 없이 단출해 더욱 가슴 아리고 뭉클하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에선 30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집에서 시장까지 뻗은 짧은 길만 오갔던 어머니가, ‘안양시 비산동 498의 43’에선 산동네에서 살다 세상을 떠났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산동네에 계신 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할머니, 그리고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에선 부엌이 따로 없는 무허가촌 사글셋방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가 시어로 되살아나 독자와 더불어 아득한 그리움의 정서를 공유하게 만든다.
6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출간한 신경림 시인. [사진제공=창비] |
특히 나이 듦을 순리로 받아들여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다시 느티나무가’는 시인의 오랜 시력(詩歷)이 빚어낸 고요하고도 묵직한 절창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시대를 외면하지 않았던 시인의 시선은 오히려 더욱 서늘해졌다. 3ㆍ4부에서 시인은 범세계적인 시선으로 부조리를 바라본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가랑잎처럼 야윈 손”으로 몸에 뱀을 감은 소년은 시인에게 “원 달러”를 외치며(‘위대한 꿈’) 빈부격차 문제의 심각성을 상기시킨다. 쓰나미로 인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한 마을을 바라보며 느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카운터에 놓여 있는 성모마리상만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하느님은 지금/어데서 어떤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는가”(‘신발들’)라는 질문으로 발전한다. “서방 잃고/아들딸 따라서 사글셋방 전셋집 떠돌면서/종잇장처럼 가벼워졌다가/마침내 폐지로 버려졌다”는 노파의 마지막 모습을 묘사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비극조차도 서정적으로 그려내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시인은 마지막 시 ‘옛 나루에 비가 온다’를 “백성이 낸 세금으로 오히려 나라가 나서서/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고 있으니/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는다는 옛 시구절은/이제 허사가 되었다/(……)/모두들 비웃듯 추적추적 철적은/비가 온다”는 일갈로 끝을 맺는다.
이 같은 일갈은 민중서정시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온 시인의 시력이 세월에 지지 않고 이어지리라는 암시 같아 안도감을 준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의 시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몇 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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