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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22. 여름 더위를 깨우는 ‘범부채’의 강렬한 관능미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6. 25.

길에서 범부채를 만나면 할 일이 생겼다.

아이팟을 꺼내 안치환의 '바람의 영혼'을 들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범부채를 감상하는 일.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이름만으로 모양을 짐작할 수 있는 꽃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개나리, 벚, 장미, 무궁화 등은 꽃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도 익숙한 꽃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이 꽃들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름만으로 꽃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그런 점에서 범부채는 직관적인 꽃입니다. 이름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꽃의 모양과 실제 꽃의 모양의 ‘싱크로율(서로 닮은 정도를 가리키는 은어)’이 꽤 높은 꽃이니까요. 범부채의 ‘범’은 호랑이, ‘부채’는 말 그대로 부채를 의미합니다. 범부채는 이름처럼 호랑이 무늬를 가진 부채 모양의 꽃입니다. 사실 범부채의 무늬는 호랑이보다 표범을 더 닮았습니다. 실제로 서양에선 꽃의 무늬가 표범을 닮았다고 이유로 범부채를 ‘레오파드 플라워(LeopardFlower)’라고 부른다는군요. 하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표범부채’란 이름은 어색하게 들립니다. 너무 ‘디테일’에 신경 쓰면 피곤해요. 범부채가 훨씬 친근하게 들리니 넘어가도록 하죠.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촬영한 범부채.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범부채는 매년 여름이면 전국적으로 피어나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50~100㎝ 가량 키를 키운 범부채 줄기는 그 끝에서 몇 가닥으로 갈라지고, 그 갈라진 가닥마다 몇 송이씩 꽃을 피웁니다. 아침에 핀 꽃은 저녁이면 지는데, 이 같은 과정은 여름 내내 반복됩니다. 따라서 범부채 꽃은 매일 새롭습니다. 여름에 피는 꽃들은 대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지만, 범부채의 화려함에 비길 만한 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범부채의 호피 무늬는 관능미의 상징으로 많은 여성들의 패션 ‘잇 아이템(It Item)’이죠. 여기에 강렬한 여름 햇살을 이기려는 듯한 선명한 주홍색이 더해지니, 여름에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꽃도 드뭅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즐기는 것은 삶의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범부채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중요한 약재 중 하나였습니다. 범부채의 지하경(땅속을 달리는 줄기)을 캐어 햇볕에 말린 것을 한방에선 사간(射干)이라고 부릅니다. 범부채는 편도선염, 결핵성 임파선염, 위염 등 주로 염증치료제로 이용되는 약재입니다. 또한 범부채는 뱀이나 독충에 물렸을 때에 환부에 붙여 독을 다스리는 용도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쓰임새가 많은 식물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캐낸 데다, 따로 재배를 하는 일이 드물다보니 요즘엔 자생하는 범부채를 마주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범부채는 화단에서 관상용으로 자라는 개체가 더 많아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시라도 길에서 범부채를 만나시거든 이렇게 즐겨보시죠. 최근 기자는 가수 안치환의 새 앨범 ‘50’을 들었습니다. 안치환은 지난해 직장암 투병을 하며 병상에서 앨범을 빚어냈죠. 그만큼 이 앨범엔 절절한 이야기를 담은 곡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삶을 관조하는 철학적인 가사와 깊은 시선을 담은 ‘바람의 영혼’은 이 앨범의 백미입니다. 바람에 흔들려 생의 관능을 깨우는 범부채 앞에서 안치환의 선 굵은 목소리에 실린 삶을 통찰하는 가사를 들어보시죠. 아마도 수사가 무의미한 전율이 일겁니다.

“이 하루를 애써 버티는 나를/그럼에도 미소 짓는 나를/어제와 같은/오늘을 살아가는 나를/아무도 박수쳐주지 않지만/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거친 바다/인생의 강물을 건너는 난/머물지 않는 바람의 영혼/난 멈추지 않는 바람의 영혼”(바람의 영혼)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