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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20. ‘국민잡초’ 개망초는 포기하는 법이 없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6. 4.

<식물왕>을 연재한 지 거의 반년에 20회 째를 맞았다.

20회 째에는 흔해도 너무 흔해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꽃을 다뤄보고 싶었다.

문득 6년 전 홀로 1번국도를 걷다 만난 개망초 꽃무리가 떠올랐다.

고민 많았던 내게 많은 감동을 줬던 개망초로 낙점!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이번 주 ‘식물왕’은 매우 사적인 이야기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이맘때의 일입니다. 기자는 경기도 평택시 거리를 힘겹게 걷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서울에서 고향인 대전까지 홀로 1번국도를 따라 걸어서 내려가던 중이었죠. 

당시 작가 지망생이었던 기자는 두 번째 장편소설 집필 여부를 고민 중이었습니다. 바로 전해에 기자는 20대 초반에 3년여에 걸쳐 쓴 첫 장편소설로 뒤늦게 모 대학교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상에 고무된 기자는 본격적으로 다른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기자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기자는 당시 휴학을 밥 먹듯이 한 터라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 든 대학생이었습니다. 졸업도 늦어졌는데 취업 준비 없이 아무런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소설을 쓰는 일이 정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죠. 번민 끝에 기자는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밀어넣고 질문을 던져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에서 촬영한 개망초.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기자가 서울을 떠나 평택에 도달했을 때는 걸은 지 이틀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겨우 이틀 째였지만 푹푹 찌는 더위에 죽을 맛이었죠. 걷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을 때쯤 기자의 눈에 마치 새벽안개처럼 하얗게 넓은 공터를 채운 꽃무리가 보였습니다. 습한 공기는 시야를 흐려 꽃무리를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더군요. 기자는 매우 지쳐 있었지만 잠시 길에서 벗어나 꽃무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마주한 꽃은 결코 특별한 꽃이 아니었습니다. 전국 어디에나 흔하고 이름조차 보잘 것 없어 잡초 취급을 받는 꽃. 바로 ‘국민잡초’ 개망초였습니다.

개망초는 이름 때문에 많은 설움을 받는 꽃이죠.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인 개망초는 국내에 들어와 퍼진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겹친다는 이유로 ‘나라 망하게 하는 풀’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아 ‘계란꽃’으로도 불리는데 참 억울한 이름이죠. 또한 개망초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농사를 방해하니 고운 취급을 받을 리 없었을 겁니다. 비록 귀화식물이지만 개망초는 오랜 세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미운 정을 쌓아 여린 잎은 나물로, 전초는 비봉(飛蓬)이란 이름의 한약재로도 쓰이고 있죠.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들은 대개 가뭄 속에서도 싱싱한 초록빛을 자랑합니다. 이는 땅 속 깊은 곳의 수분을 흡수하는 강력한 뿌리 덕분이죠. 또한 잡초는 그 뿌리로 척박한 땅의 숨통을 열고 중금속을 흡수해 표토층을 되살립니다. 또한 생명이 다해 쓰러진 잡초는 그 자체로 비료 역할을 하는 유기물이죠. 개망초 역시 그러한 잡초들 중 하나입니다. 인간에게 쓰임새가 요긴하지 않다는 이유로 잡초 취급을 받기엔 개망초는 할 말이 많습니다.


대전 대덕구 송촌동 정수장에서 촬영한 개망초.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길 위에서 만난 개망초의 모습이 기자를 닮은 것 같아 문득 뭉클해지더군요. 흔한 개망초가 일궈낸 흔하지 않은 장관에 압도된 기자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무사히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기자는 한 사찰로 들어가 계획한 장편소설의 집필을 마쳤습니다. 그 작품은 기자가 기자로 일을 하게 된 이후 2년 만에 모 문학상을 수상하며 뒤늦게 빛을 봤죠. 돌이켜보면 개망초의 공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버거울 때 개망초의 앙증맞은 꽃 뒤에 숨겨진 생명력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개망초는 포기하는 법이 없더군요.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