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35. 가을은 국화꽃 향기 속에서 무르익는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10. 1.

국화를 쓸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국화과 꽃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코스모스와 개망초는 국화과 꽃인데, 코스모스가 인간이고 개망초가 침팬지라면 국화는 마치 영장류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가을에는 국화 아닌가? 나중에 국화과 꽃을 이것저것 많이 다루더라도 한번은 짚고 넘어갈 이름이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10월 2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여름을 닮은 가을을 온전히 가을로 만들어 주는 것은 비입니다. 가을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여름의 잔여물들은 9월 말부터 10월 초 무렵에 내리는 비를 맞은 뒤에야 비로소 씻겨 내려가죠. 비는 가을뿐만 아니라 모든 계절의 불분명함을 가름하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초봄의 꽃샘추위는 봄비를 맞은 후에야 물러가고, 여름의 불볕더위는 장마가 지나간 후에야 제대로 기승을 부리죠. 겨울비야 말할 것도 없고요. 제법 차가운 가을비 맞은 후에야 색을 더하는 꽃이 있습니다. 가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 바로 국화(菊花)입니다.

국화가 우리에게 유독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맞아도 홀로 오연하게 꽃을 피우는 기백 때문일 겁니다.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는 뜻을 가진 ‘오상고절(傲霜孤節)’이란 말도 이런 국화의 모습에서 유래합니다. 

중국 원산으로 동양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국화는 17세기 네덜란드인에 의해 일본에서 서양으로 건너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습니다. 현재 국화의 품종은 전 세계적으로 약 30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계절과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나 국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죠. 하지만 국화는 역시 가을에 피어야 제격입니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서 촬영한 국화. 정진영 기자/123@hereldcorp.com

옛사람들은 국화를 은둔하며 절개를 지키는 선비에 빗대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귀하게 여겨 오래전부터 관상용으로 재배해왔습니다. 지난 1712년 일본에서 간행된 백과사전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에는 “인덕천황(仁德天皇) 73년에 백제로부터 청, 황, 적, 백, 흑색의 국화가 도입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인덕천황 73년은 서기 385년으로 백제 진사왕(辰斯王) 대입니다. 오랜 재배의 역사만큼 국화는 품종에 따라 노란색, 흰색, 빨간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으로 피어나고 크기와 모양 또한 서로 많이 다릅니다. 그만큼 가을은 더 풍성해졌죠.

역사가 오래된 꽃인 만큼, 국화에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도 많습니다. 중국 동진(東晋)의 갈홍(葛洪)이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포박자(抱朴子)’는 국화를 “신선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대(漢代) 유향(劉向)이 지은 중국 최초의 설화집 ‘열선전(列仙傳)’은 “팽조(彭祖)가 국화를 먹고 1700세를 살았으나 얼굴은 17~18세의 소년과 같다”, “유생(劉生)은 흰 국화의 즙을 짜 마시고 500세를 살았다”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죠. 예나 지금이나 국화는 차로 인기 있는 재료입니다. 국화차는 눈을 밝게 하고 머리를 좋게 하며, 신경통과 두통 및 기침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차로 음용하는 꽃인 캐모마일도 국화의 일종입니다. 캐모마일은 서양에선 잠들기 전에 마시는 차로 유명하죠.

추석 연휴가 지나자 전국적으로 제법 많은 양의 가을비가 내려 마른 땅을 적셨습니다.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연초의 다짐들을 되새겨보기에 좋은 날씨이죠.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그윽한 향기는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일품입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