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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36. 가을 햇살 아래 잎사귀 위로 내리는 눈 ‘설악초’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10. 15.

가을이 깊어진 전국 곳곳의 화단에서 눈이 내린다.

잎이 하얗게 물드는 설악초처럼 잎이 꽃보다 아름다워 즐거운 식물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바라보기에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헤럴드경제 본사 근처에도 곳곳에 설악초가 눈을 내리고 있었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10월 16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우리는 종종 꽃으로 계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벚꽃은 봄을, 수국은 여름을, 국화는 가을을 감지하게 만들죠. 그런데 몇몇 꽃은 계절보다 한 발짝 앞서 피어나 때 이른 계절감을 선사하곤 합니다. 일례로 매화는 겨울과 봄 사이에, 패랭이꽃은 봄과 여름 사이에, 코스모스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기지개를 펴죠. 

사람들은 편의상 사계절을 구분하고 있지만, 뜰에선 온전히 하나의 계절인 경우가 드뭅니다. 지난 여름의 화단에 가을이 뒤섞여 있었듯이, 가을의 화단에도 겨울이 뒤섞여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을 화단 곳곳에선 눈이 내립니다. 가을 햇살이 맑을 수록 강설량도 많아지죠. 한겨울 밤새 눈 내린 다음 날에 아침 해가 비치면 온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듯, 잎에 내린 눈으로 가을을 빛내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설악초(雪嶽草)입니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헤럴드경제 사옥 부근에서 촬영한 설악초.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설악초는 북미 온대 지방 원산의 한해살이풀입니다. 이름의 유래는 설악초를 단 한 번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오기 전까지 설악초는 그저 수많은 이름 모를 식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설악초는 가을이 오면 초록색 잎에 새하얀 테를 두르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흰 테두리도 두께를 더하죠. 미대륙 원산의 식물들이 그러하듯, 설악초 역시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해 매년 이맘때면 전국 각지의 화단에 눈을 내립니다.

설악초도 꽃을 피우지만, 그 색이 잎에 내린 눈과 같고 크기도 매우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설악초는 꽃을 피우는 식물 중에선 보기 드물게 꽃보다 잎이 더 아름다운 식물입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전초가 새하얀 꽃다발처럼 보일 정도이죠. 밤에 달빛을 받은 설악초는 마치 형광물질을 발라 놓은 것처럼 유난히 하얗게 보입니다. 설악초는 원산지인 북미에선 ‘산의 눈’이란 의미를 가진 ‘스노 온 더 마운틴(Snow On The Mountain)’이라고도 불린다는군요. 비록 번역된 이름이긴 하지만 설악초라는 이름도 ‘스노 온 더 마운틴’이란 이름도 모두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 존재는 없습니다. 장미가 가시를 지니고 있듯이, 설악초도 실은 독을 품고 있습니다. 설악초를 꺾으면 하얀 유액이 나오는데, 이 유액이 눈이나 피부에 닿으면 알레르기나 발진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키우는 가정에선 관상용으로 키우기 곤란한 식물입니다. 관상용은 말 그대로 관상용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데 절로 사람을 해하는 식물은 없습니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서 촬영한 설악초.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설악초의 꽃말은 ‘환영’, ‘축복’입니다. 가을에 눈처럼 빛나는 새햐안 잎과 마주하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환영’이고 ‘축복’ 아닌가요? 마음에 둔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가 설악초를 보시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고 설악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시죠. 다가올 겨울이 쓸쓸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 높아질 겁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