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 소설집‘베로니카의…’
여행으로 일상의 이면 드러내
여행은 자신뿐만 아니라 동행하는 가족·연인·친구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다. 여행 중 돌발하는 변수에 대응할 때 서로의 몰랐던 모습이 드러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권지예 작가는 이국의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일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 탁월한 소설가다. 권 작가가 10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은행나무)은 이국에 놓인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허상이 아닌지 묻는다.
소설집에 실린 여섯 작품 중 다섯 작품의 배경이 이국이다. 각 작품 속에서 이국의 공간은 현재 자신과 주변을 재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다.
표제작인 중편 ‘베로니카의 눈물’은 마치 여행기를 보는 듯 생생한 쿠바의 풍경 묘사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새 작품을 쓰기 위해 쿠바로 온 주인공은 ‘카사’(쿠바의 민박집)를 관리하는 70대 노인 ‘베로니카’가 선을 넘으며 베푸는 호의를 믿다가도 의심하기를 반복한다.
이해와 오해 사이를 줄타기하며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서술과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다.
여행은 작품 곳곳에서 관계를 성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는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부부 사이인데도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어떻게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지 그려낸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에는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던 부부가 등장해 여행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붙어 다니면서 묵은 감정과 기억을 소환한다.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숨겨진 이야기를 뒤늦게 알게 된 아내가 여행을 통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의 결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권 작가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질문한다.
아울러 권 작가는 개인의 삶을 세대 및 사회적 이슈와 연결해 들여다보려 시도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는 친구 부부 대신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대리 참석한 엄마와 딸이 등장한다. 엄마는 여행 내내 예민한 태도를 보이는 딸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미투’ 고백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소환한다. 엄마가 딸과 자신의 과거를 응원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개인의 삶이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며 관계를 인식하는 지평을 확장한다. 권 작가가 오랜만에 소설로 안내하는 여행은 여전히 즐겁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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