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룸’의 저자 수전 팔루디의 아버지가 젊었을 때 모습(왼쪽 사진)과 노년에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의 모습(오른쪽). 저자는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며 가장 내밀한 삶이 어떻게 보편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를 짚는다. 아르테 제공다크룸 /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아르테
퓰리처상 수상 페미니스트 딸
경계인으로 산 아버지 삶 추적
유대인이지만 나치완장 차기도
폭력적 가부장서 결국 성전환
性정체성서 인종·민족·국가로
개인사서 사회사로 탐구 확장
삶·죽음만 유일한 이분법 결론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이었던 아버지가 이혼 후 가정을 떠난 지 수십 년 만에 딸에게 이메일로 연락해 근황을 알렸다. 자신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이름도 바꿨다고. 빨간 스커트를 걸치고 하이힐을 신은 노부인으로 변한 자신의 사진과 함께.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 움직임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예리하게 분석한 저서 ‘백래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쓰며 살아온 저자가 여성으로 변한 아버지를 보고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거짓말 같은 현실과 마주한 저자의 선택은 저널리스트답게 아버지를 이해해보기 위한 심층취재였다. 저자는 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10년에 걸쳐 아버지의 삶을 추적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역사와 개인사의 격랑 속에 늘 자신을 가장해야 했던 아버지의 여러 이름과 정체성 등을 만난다. 여러 면에 걸쳐 경계인으로 산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며 저자는 가장 내밀한 삶이 어떻게 보편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를 짚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 건너 고지대인 부다 지역에서 나라 없는 민족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생부터 경계인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처음에 ‘이슈트반 프리드먼’이란 이름을 가졌던 그는 헝가리의 민족 동화 정책에 푹 빠져 18세 무렵에 자신의 성을 헝가리 민족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팔루디’로 바꿨다. 민족 동화를 부르짖던 헝가리는 유럽 내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으로 홀로코스트(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에 가담했다. 그는 생존하기 위해 나치 완장을 차며 유대인이 아니라고 연기했다. 그런데도 탄압을 피하지 못한 그는 결국 미국으로 도망쳐 삶을 이어갔다. 미국에서 사진가 ‘스티븐’으로 살던 그는 ‘정상 가족’의 가장이 되기를 원했지만 이혼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생의 마지막 시절에 성전환 수술을 한 뒤 모국 헝가리로 돌아가 노부인 ‘스테파니’로 살던 중 세상을 떠난다. 한 사람의 삶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고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저자는 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 파고든다. 방법은 자기만의 암실 속에 갇혀 있던 아버지라는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는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추적한 결과물은 그저 한 사람의 서사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젠더 정체성이란 창을 경유해 인종·민족·국가·종교 등 보다 넓은 영역으로 탐구의 폭과 범위를 확장해 나간 끝에 우리에게 필요한 이분법은 단 한 가지, ‘삶과 죽음’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여성성이든 남성성이든, 어떤 종교·정치·국가적 정체성이든 자기 정체성의 독재자가 되지 않는 한,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범주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가 써내려간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보편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가 보편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귀를 닫는 사람들이 세상에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서문을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가 결국은 정치적인 이야기”라며 “우리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사이에 경계란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다채롭고 서로 모순되는 삶의 단계와 양상을 부정하는 완벽한 범주라는 개념은 결국 허상이며, 이를 고집하는 태도는 전체주의적인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644쪽, 3만30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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