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사이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공통으로 가진 추억의 키워드 하나가 있으니, 바로 프로레슬링이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로얄럼블', '헐크매니아', '올스타전' 등 경기 영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입고되면 아이들은 일제히 흥분했다.
VHS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있는 집에 한데 모인 아이들은 함께 영상을 보며 환호했고, 영상이 끝난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경기 기술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마치 군대에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중계 영상을 함께 보다가 운동장으로 공을 들고 뛰쳐나가는 군인들처럼.
특히 동네에 있는 방방(대전에선 트램펄린을 이렇게 불렀다)은 드롭킥, 스피어 등 레슬러 기술을 재현하기에 최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WWF가 'World Wrestling Federation'이 아니라 'World Wildlife Fund'의 약자로 쓰인다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빌어먹을 판다 녀석!
사설이 지나치게 길었다.
아무튼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이 작품을 읽는 기분이 남다를 테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때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오는 10월의 마지막 밤.
주인공은 삼촌이 운영하는 이태원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에서 20년 넘게 일하는 40대 후반 알코올 중독 아재.
이곳에 주인공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워리어가 나타난다.
마침 이태원에는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노란 빤쓰를 입은 헐크 호건, 톤파를 든 빅보스맨, 목에 뱀을 두른 제이크 더 스네이크, 돈 자랑하던 밀리언 달러맨 등 왕년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그리고 뜬금없이 주인공이 링 위에 오른다.
'병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설정 아닌가.
실제로 웃픈 개그로 가득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외출복이 없는 워리어에게 최후의 인디언 전사 컨셉 의상을 준다며 국내 브랜드 '인디안' 옷을 주고, 워리어는 그 옷을 마음에 들어 하며 탑골공원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식이다.
유난히 각주가 많은 소설인데, 빠짐없이 읽어보자.
프로레슬링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진짜 정보와 관계없는 '병맛'인 각주가 한둘이 아니다.
김홍 작가 소설의 개그와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90년대를 관통하는 온갖 '밈'이 가득해 웃음을 자아내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주인공은 청소년 시절에 워리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헐크 호건을 좋아하는 선배에게 쥐어터져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학폭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명백히 학폭이다.
그 자리에서 내적 성장이 멈춰버린 채 중년을 맞은 주인공에게 희망이란 게 있을까.
주인공은 워리어 대신 링 위에 올라 헐크 호건과 맞다이를 까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죽은 워리어도 죽지 못해 사는 주인공도 부활한다.
당연히 판타지다.
승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의 미래는 조금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서 결판을 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르니 말이다.
쉽게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좌절했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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