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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X파일] 연말결산 2013년 올해의 앨범 ‘TOP11’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3. 12. 26.

연말에 한번 올해의 앨범을 뽑아보는 기획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야 마쳤다.

이곳저곳에서 올해의 앨범 선정이 이뤄졌는데, 다들 큰틀에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놀랐다.

좋은 음악은 결국 보편성을 확보하는 법이다.

특히 선우정아, 이승열, 장필순, 조용필의 앨범엔 이견을 제기할 수가 없겠지.

 

 

 

[취재X파일] 연말결산 2013년 올해의 앨범 ‘TOP11’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연말이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올해의 앨범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음악에는 수학처럼 정해진 공식이 없는 만큼, 선정 결과엔 선정자의 주관 개입이 필연적입니다. 선정 결과에 대한 찬반논쟁은 피할 수 없지요. 기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거나 때로는 갸우뚱거리며 여러 선정 결과를 눈여겨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득 욕심이 생기더군요. “나도 올해 정말 원 없이 음악을 들었으니 한 번 베스트 앨범을 뽑아볼까?”

대중음악 담당 기자의 주된 일과 중 하나는 새로운 앨범을 듣고 인터뷰 대상 뮤지션을 고르는 일입니다. 인터뷰이 선정 기준은 기자들 저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첫째, 새로운 작품을 발표한 유명 뮤지션들입니다. 이러한 인터뷰이로는 이전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중견 가수나 아이돌 등을 꼽을 수 있겠군요. 둘째, 인지도와 상관없이 좋은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들입니다. 이러한 인터뷰이로는 아무래도 인디 뮤지션들이 많은 편입니다. 셋째, 기자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선택한 뮤지션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세 가지 기준의 비중은 ‘첫째>둘째>셋째’로 도식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 같아선 ‘셋째>둘째>첫째’이지만, 신문 지면이라는 특성상 이 기준은 그저 기자의 생각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신문 지면은 어디까지나 독자를 우선으로 생각해야지 기자 개인 블로그가 아니니까요.

‘[취재X파일]’은 헤럴드경제 기자들이 지난 6월부터 인터넷으로만 배포하는 신개념(?)의 기사입니다. 지면의 딱딱한 문체 대신 다소 가벼운 필치의 경어체로 독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가려는 기자들의 시도가 기사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요. 당황하셨어요? 선정 결과에는 기자의 주관이 깊게 개입돼 있으니 “무슨 기사가 이래?”하며 당황하지 마시고요. ‘TOP10’은 흔해 보여서 ‘슈퍼스타K’처럼 ‘TOP11’을 선정했고, 순위를 매기는 대신 가나다순으로 배치했습니다.

 

 

▶ 가을방학 정규 2집 ‘선명’= 지난 2010년에 발매된 가을방학의 정규 1집 ‘가을방학’은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죠. 정바비의 유려한 멜로디와 ‘음색깡패’ 계피의 보컬이 조화를 이룬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취미는 사랑’ 등의 곡은 인디신을 넘어 적지 않은 고정 팬들을 확보하며 가을방학을 인기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같은 인기의 원인 중 하나는 마냥 밝아 보이기만 하는 곡들에 스며들어 있는 쓸쓸함의 정서일 것입니다. 특히 ‘이브나’ 같은 곡은 가을방학 특유의 쓸쓸함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죠. 

정규 2집 ‘선명’은 1집의 밝은 모습을 다소 걷어내고 쓸쓸함의 정서에 서늘함까지 더한 차별화된 결과물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 ‘즐거운 인생’ ‘전우치’ 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던 이병훈이 프로듀싱한 전작과는 달리 직접 프로듀싱을 맡은 것이 음악적 변화에 큰 영향을 줬지요. ‘날 떠난 네가 혼자 잘 사는 꼴은 못 보겠다’는 현실적인 이별 이야기를 담은 ‘잘 있지 말아요’는 이 앨범의 새침한 면을 잘 보여주는 곡이지요. 또한 ‘더운 피’는 가을방학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격렬함과 처절함을 시리게 담아낸 역작으로 필청 트랙입니다. 이 앨범은 1집보다 덜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1집 이상으로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 밤새도록 은근하게 오래 타는 장작불 같은 앨범입니다. 

▶ 강아솔 정규 2집 ‘정직한 마음’=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을 움직이는 선율과 노랫말을 가진 새로운 음악과 만나는 일은 어려워집니다. 음악이 유행과 세월의 벽을 넘어 보편적인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일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강아솔의 정규 2집 ‘정직한 마음’은 과장 없는 일상의 언어와 절제된 연주로 보편적인 감동과 서정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앨범입니다.

어머니가 보낸 쪽지의 글귀로 가사를 쓴 타이틀곡 ‘엄마’의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마는 늘 염려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귤을 보내니 맛있게 먹거라”와 같은 특별할 것 없는 안부는 곡의 여백 위에서 가슴 시린 시어로 승화돼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강아솔이 지하철에서 우연히 두 노인의 대화를 듣고 만들었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제 나까지 일곱 남았네. 이제 수를 세는 데 열 손가락도 채 필요하지 않는군”과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은 여고 동창생을 생각하며 만든 ‘끝나지 않을 이야기’의 “자는 아들 안고 있는 너를 보면 수업 시간에 그렇게 자던 네가 떠올라” 같은 가사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청자를 미소 짓게, 때로는 숙연하게 만듭니다. 음악으로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음악과는 별개로 강아솔 개인은 밝고 엉뚱한 모습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제주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회는 잘 못 먹지만 초밥은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다니 말을 다했지요.

▶ 고래야 정규 1집 ‘Whale Of A Time’= 한국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된 터라, 대중가요에 길들여진 귀에 국악은 우리의 것이지만 낯선 음악이죠. 이제 국악은 일부러 찾아 듣지 않는 이상 ‘나라의 음악’이란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접하기 어려운 음악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악에 팝의 요소를 담아낸 퓨전 국악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그러나 퓨전 국악은 대중에게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팝의 뼈대 위에 국악기로 구색만 맞췄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하기도 쉬운 섬 같은 음악입니다.

 

밴드 고래야(Coreyah)의 정규 1집 ‘Whale of a Time’은 고루하지 않은 세련된 문법으로 퓨전 국악을 월드뮤직으로 승화시키며 국악 대중화의 또 다른 대안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총각 나무꾼과 나물 캐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마당극 형식으로 풀어낸 ‘어드로갈꼬’, 거문고의 거친 울림과 대금소리가 쌓여가는 타악기 리듬과 어우러져 긴장감을 더하는 ‘물속으로’, 비틀즈의 원곡을 국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독특한 느낌으로 재해석한 ‘Norwegian Wood’, 큰 스케일의 연주 위에 양금 소리가 신비감을 더하는 ‘Whale of a Time’까지 이 앨범은 국악을 넘어 잘 만든 음악의 성찬입니다. 김수철의 명반 ‘황천길’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가진 퓨전 국악 앨범이라는 것이 기자의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고래야는 지난달 서울 원서동 북촌창우극장에서 토속민요 프로젝트 공연 ‘불러온 노래’를 벌였습니다. 민요가 옛사람들의 삶의 풍경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그 시대의 유행가였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민요를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유행가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시도였죠. 다음 앨범엔 세련시킨 공연의 결과물들이 담길 전망입니다.


 

 

▶ 레이시오스 정규 1집 ‘Lusty Initialization’= 지난 2008년 밴드 더 레이시오스(The Ratios)의 첫 정규 앨범 ‘버닝 텔레파시(Burning Telepathy)’은 ‘저주 받은 걸작’이었습니다. 밴드 시나위 출신 보컬 김바다를 중심으로 결성된 더 레이시오스는 당시 국내에선 보기 드문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록을 선보였죠. 그러나 이 앨범은 고작 1000장만 제작된 채 사장됐고,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라는 평단의 아쉬움 섞인 극찬 속에 이 앨범은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일렉트로닉 록은 대중에게 그리 낯선 음악이 아닙니다. 이디오테잎ㆍ글렌체크 등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요.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레이시오스(Ratios)로 변경하고 5년 전 앨범을 다시 손 봐 ‘Lusty Initialization’이란 이름으로 재발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앨범의 전반적인 사운드가 원작보다 풍부하고 따뜻해졌습니다. 따뜻한 신서사이저 사운드와 유영하는 듯한 몽환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타이틀곡 ‘러브 이즈 올(Love is All)’부터 걸그룹 크레용팝이 코러스로 참여해 흥을 더하는 일렉트로닉 펑크 ‘예예예(Yeah! Yeah! Yeah!)’까지 앨범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곡들의 향연입니다.

비록 이 앨범은 5년 전 앨범을 다시 손을 봐서 재발매한 작품이지만 새로운 작품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음악적으로도 앞선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선우정아 정규 2집 ‘It’s Okay, Dear’=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 소속 아티스트들의 음악에 열광한 팬들에게 선우정아란 이름은 꽤 익숙한 이름입니다. YG의 팬들은 2NE1의 ‘아파’와 지디앤탑(GD&TOP)의 ‘Oh Yeah’ 등의 히트곡에서 선우정아란 이름을 작사자ㆍ작곡자ㆍ편곡자로 목격했을 것입니다.

선우정아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앨범 크레디트에서 벗어나 정규 2집 ‘It’s Okay, Dear’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음악 세계를 펼쳐냈습니다. 이 앨범에서 선우정아는 재즈와 소울을 메인 요리로 삼아 일렉트로닉, 록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을 양념으로 버무려내며 신기에 가까운 음악적 내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웰 메이드’ 가요를 압도하는 멜로디 라인은 메이저와 마이너의 감성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대중성까지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탐을 냈던 값비싼 외투인데 이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투덜거리는 ‘뱁새’부터 “인맥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공주는 말보로에게 목소리를 팔고”라고 비꼬는 ‘워커홀릭(Workaholic)’,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배부른 소리하네”라고 자조하는 ‘알 수 없는 작곡가’ 등 생활밀착형 튀는 가사 역시 이 앨범의 강력한 매력입니다.

이 모든 매력들을 화학적으로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은 선우정아의 탁월한 보컬입니다. 선우정아는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때로는 능청스러운, 때로는 절규하는 보컬로 앨범에 다채로운 색깔을 덧입힙니다. 선우정아는 싱어송라이터가 단순히 자신의 곡을 스스로 부르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님을 탁월한 보컬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선우정아는 이 앨범을 인디 레이블(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을 통해 발매했습니다. 히트 작곡가로 이름을 알려온 그간의 행보에 비춰보면 의외의 선택이지만 선우정아는 “기획사의 영향력과 자본도 중요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음악적인 타협을 하고 싶진 않았다”며 “온전히 내가 하고픈 음악으로 앨범을 만들고 싶어 인디레이블을 선택했고 후회는 없다”고 기자에게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고집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 야야 정규 2집 ‘잔혹영화’=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을 일종의 ‘힐링뮤직’이라고 주장하면 동의할 독자가 과연 얼마나 존재할지 모르겠습니다. 야야의 정규 2집 ‘잔혹영화’는 처음엔 낯설음으로 청자를 당황케 하다가 이내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매혹시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한커풀 벗겨내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홀로 내몰려 괴롭게 헐떡거리는 짐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앨범의 밑바닥에 도사린 외로움과 슬픔은 지독히 깊습니다. 이 앨범은 마치 상처에 굵은 소금을 뿌리고 상처를 후벼 팜으로써 고통을 선명하게 일깨우는 듯한 태도로 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이 앨범을 들은 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강신무의 살풀이였습니다. 기자는 이 앨범을 올바르게 독해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야야를 만났습니다. 기자의 독해와 야야의 의도는 거의 100%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야야는 “힘내라는 말만큼 진정으로 힘든 사람에게 무의미한 말은 없다고 본다”며 “외롭고 힘들어 울고 싶을 때 같이 울어주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위로다운 위로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하더군요. 기자의 마음에도 꽤나 어두운 구석이 많은가 봅니다.

이 앨범은 옴니버스 영화 콘셉트를 따르는 등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러닝타임은 무려 1시간을 넘길 뿐만 아니라, 영화 스틸 컷을 연상케 하는 사진과 개요를 담은 앨범 속지의 양도 70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거의 정상급 아이돌의 앨범을 연상케 하죠. 음악적으로도 록을 비롯해 사이키델릭ㆍ클래식ㆍ재즈ㆍ일렉트로닉ㆍ트립합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가 곡들에 혼재돼 있어 특정 음악의 계보에 분류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호불호를 접어두고 온전히 음악에 몸을 맡긴다면 국내의 그 어떤 앨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 것입니다.

 

 

 

▶ 이승열 정규 4집 ‘V’= 낯설고 난해한 선율, 거친 붓질을 닮은 질감의 연주와 녹음, 라디오 DJ 입장에서 청자에게 들려주기 망설여지는 긴 곡의 길이까지……. 이승열의 정규 4집 ‘V’는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앨범은 첫 곡 ‘마이너토어(Minotaur)’부터 파격의 연속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일부를 불어로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해 아라비안 스케일을 연주하는 베트남 전통 현악기 단보우(Dan Bau)까지 ‘마이너토어’는 8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온갖 이국적인 색채로 덧칠된 전위적인 추상화를 그려냅니다. 전면에 등장하는 단보우 연주가 이국적인 색채를 극대화하는 ‘위 아 다잉(We Are Dying)’과 ‘개가 되고’, 장장 10분 가까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초기작을 연상케 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연출하는 ‘후(Who?)’까지 앨범의 수록곡들은 지금까지 한국 대중음악에서 들을 수 없었던 온갖 음악적 실험의 향연을 펼쳐냅니다. 그러나 앨범이 귀에 익을수록 낯설음은 조금씩 매혹으로 치환됩니다. 이 매혹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당혹스럽습니다. 이 앨범은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문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앨범의 또 다른 큰 특징은 주요 수록곡을 공연장(홍대 벨로주)에서 ‘원테이크(One Takeㆍ곡을 끊임없이 한 번에 녹음하는 방식)’로 라이브에 가깝게 녹음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엔 수록곡들은 스튜디오 녹음의 정밀한 사운드 대신 라이브 특유의 현장감으로 청자를 사로잡습니다.

▶ 장필순 정규 7집 ‘Soony Seven’= 이 앨범에 무슨 말을 보태겠습니까. 첫 곡 ‘눈부신 세상’부터 청자를 압도하는데 말입니다. ‘눈부신 세상’ 전반부의 어지간한 가요 1절이 흘러갈 만한 시간을 채우는 것은 핑크 플로이드의 대곡 ‘Echoes’를 연상케 하는 물방울 소리처럼 고요하고도 신비로운 울림뿐입니다. 이 같은 울림이 낯설고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고 여유를 부린다면, 이 곡은 조용히 다가와 음악 자체의 순결함으로 청자를 섬세하게 어루만집니다. 타이틀곡 ‘맴맴’부터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1동 303호’까지 이 앨범은 내려놓음의 미학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수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세련됐지만 화려하진 않습니다. 내려놓은 자리로 기교를 뺀 장필순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게 스며들어 나머지 소리들을 조율합니다. 90년대 하나음악 특유의 서정과 일렉트로닉 사운드 등 트렌디한 요소들이 한 공간에서 유영하되 반목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내려놓음 덕분이죠.

장필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주도입니다. 드럼을 제외한 앨범의 악기 녹음은 모두 장필순의 제주도 집에서 진행됐습니다. 하나음악 시절 동료들이 하나둘씩 섬으로 모여들어 다시금 소박한 음악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오랜 음악적 동반자이자 제주도 주민인 조동익이 앨범 제작을 지휘했죠. 한국 포크 음악의 거목이자 하나음악의 수장이었던 조동진을 비롯해 후배 싱어송라이터 고찬용과 이규호가 장필순의 제주도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앨범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앨범 발매 전 기자와 만난 장필순은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레 기교가 줄어들었고 빈 공간과 울림을 즐길 수 있게 됐다”며 “주변으로부터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삼 내가 열심히 작업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고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래요. 이제 와서 고백을 하자면 기자도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 조용필 정규 19집 ‘Hello’= ‘가왕’내지 ‘국민가수’로 조용필을 기억하는 분들이 동의할 진 모르겠지만, 20년에 가까운 ‘조용필 빠돌이’인 기자는 조용필의 음악적 진수는 90년대 초반에 발매된 앨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필은 90년대 들어서 어덜트 컨템퍼러리 성향의 록으로 음악적 변화를 꾀했습니다. 당시 40대의 나이로 접어든 조용필은 1990년 12집 ‘Sailing Sound’를 통해 강렬하고 무거운 록사운드를 선보였죠. 이 앨범의 타이틀곡 ‘추억 속의 재회’와 ‘해바라기’는 조용필 음악의 진보와 변화를 잘 보여주는 곡입니다. 특히 미국 유명 프로듀서 탐 킨과 손잡고 만든 13집 ‘The Dreams’는 조용필의 골수팬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앨범임과 동시에 많은 음악인이 걸작으로 손꼽는 앨범입니다. 타이틀곡 ‘꿈’을 비롯해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접근이 인상적인 ‘지울 수 없는 꿈’, 수준 높은 라틴 댄스를 들려주는 ‘장미꽃 불을 켜요’ 등 음악적으로 주목해야 할 곡이 한둘이 아닙니다. 1992년에 발매된 14집 역시 13집 못지않은 완성도를 가진 앨범입니다. 클래시컬한 연주에 실린 절제된 보컬이 격조를 더하는 ‘슬픈 베아트리체’, 장대한 스케일과 삶을 관조하는 가사가 돋보이는 ‘고독한 러너’를 비롯해 성인 취향 발라드의 진수를 들려주는 ‘추억에도 없는 이별’과 ‘슬픈 오늘도, 기쁜 내일도’ 등 숨겨진 명곡의 향연입니다. 그러나 이 앨범은 같은 해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풍에 휩쓸려 묻혀버리고 말았죠.

 

조용필의 음악을 몰랐던 젊은 세대는 19집의 수록곡 ‘Bounce’ ‘Hello’ ‘설렘’ ‘서툰 바람’ 등의 세련된 브릿팝과 모던록 사운드에 열광했지만, 지금 이상의 세련된 조용필의 록사운드가 이미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완성돼 있었습니다. 다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조용필은 19집을 통해 로커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로커였습니다. 이 앨범은 뒤늦게나마 ‘로커 조용필’의 면모를 제대로 알리고 좋은 음악은 결코 나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줬다는 점에서 올해 그 어떤 앨범보다도 큰 의미를 가진 앨범이기도 합니다.

 

 

 

▶ 조커 정규 1집 ‘Kaleidoscope’= 아류가 없는 음악입니다. 팝의 문법을 따르는 것 같아 방심하는 사이에 퓨전재즈를 방불케 하는 다채로운 리듬과 연주가 자연스레 귓가로 스며들죠. 하드록을 닮은 강렬한 연주는 어느새 모던록 특유의 몽환적인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코드 진행과 멜로디는 예상을 철저히 배반하며 제 갈 길을 가고 기승전결조차 모호합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조커 정규 1집 ‘Kaleidoscope’은 ‘독창적’ ‘진보적’이라는 진부한 수식어가 결코 진부하지 않은 앨범입니다.

사실 조커는 신인이라고 부르는 일이 민망할 정도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앨범 발매 전부터 이미 알 만한 뮤지션들은 다 아는 유명 키보드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임재범ㆍ신승훈ㆍ이소라ㆍ김범수ㆍ김태우 등의 공연과 앨범의 연주자로 활약했고, 또 연주자를 넘어 이들의 곡에 작ㆍ편곡으로도 참여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죠. 에피톤 프로젝트ㆍ박주원 등 동료 뮤지션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Kaleidoscope’는 ‘만화경(萬華鏡)’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죠. 만화경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무늬는 결코 다시 같은 모양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음 결정처럼 일종의 규칙성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앨범에 담긴 곡들은 저마다 만화경이란 의미를 가진 타이틀처럼 다채롭지만 흐름에서 홀로 이탈하지 않으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 프롬 정규 1집 ‘Arrival’= 인디 포크는 싱어송라이터 계보에서 소외된 여성의 약진이 돋보이는 몇 안 되는 장르입니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은 포크라는 장르를 넘어 ‘홍대’라는 이름으로 퉁치는 인디 음악계의 클리셰(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요. 그만큼 클리셰를 향한 대중의 피로감도 커졌고, 이를 방증하듯 ‘홍대여신’은 이제 찬사보다 비아냥거림에 더 가까운 수식어입니다.

클리셰의 고집은 안전하나 진부하고, 탈피는 신선하나 위험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변주일 것입니다. 프롬(Fromm)의 첫 정규 앨범 ‘Arrival’은 목소리에 감정을 과잉하는 대신 일상성을 유지하고, 음악을 세련시키기보다 거칠지만 포근한 원형질을 보존함으로써 클리셰의 색다른 변주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포크 여성 싱어송라이터에겐 흔치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프롬은 마치 말을 하는 듯한 힘을 뺀 보컬로 노래를 부르며 앨범에 확실한 개성을 부여합니다. 유례를 찾기 힘든 파스텔 톤의 ‘빈티지’ 사운드는 앨범 전체에 몽환적이고도 아득한 공간감을 형성합니다. 가사가 철저히 한글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이 공간감 때문입니다. 이 앨범은 멋지게 변주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인디 포크의 음악적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