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일엽 스님(1896~1971)은 무려 30여 년 동안 몸소 죽비를 쥐는 입승 역할을 맡았다. 속세에서 김원주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스님은 여성해방운동을 벌이며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던 신여성이었다. 입적 전까지 단 한 순간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근세에 보기 드문 선승이란 평가를 받았던 선승과 속세에서 자유연애로 파란을 일으키고 탁월한 문장으로 필명을 날렸던 신여성 사이의 간극은 범인의 시각에선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일엽 스님의 출가 전 흔적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구도자적인 삶은 사랑에 실패하고 출가한 비구니란 이미지에 많이 가려져 있었다.
일엽 스님의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이 영역 출판됐다. 출가 후 절필한 그는 수덕사에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960년부터 수필집과 시집을 펴내기 시작했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은 일엽 스님의 1960년 저서로 그의 삶과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조계사 인근 식당에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 영역판 출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일엽 스님의 4대 손상좌 경완 스님이 참석했다.
경완 스님은 “일엽 스님은 생전에 자신의 생각이 중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며 “스님은 자신의 책이 영어로 번역돼 서양인들이 읽기를 소원했는데, 반세기만에 그 바람이 이뤄져 감격스럽다”고 밝혔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의 영역서 ‘어느 비구니 선승의 회상(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은 미국 아메리칸대 철학과 교수가 번역하고 하와이대 출판사가 펴냈다.
일엽 스님의 저서가 영역된 이유에 대해 경완 스님은 “근대 선승들은 깨달음은 글이나 말에 기대지 않는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중시해 저서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며 “박진영 교수가 한국 근대 불교에 대한 책을 찾던 중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접했고 이에 심취해 대학원 교재로 쓰게 된 것이 인연”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서문, 1부, 2부로 구성돼 있다. 서문은 번역자인 박 교수가 ‘김일엽: 삶과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일엽스님의 삶과 문학, 신여성으로서의 활동, 종교관을 소개한다. 1부 ‘어느 수도인의 회상’은 ‘인생’, ‘불교와 문화’, ‘만공대화상을 추모하며(15주기일에)’, ‘입산 25주년 새해를 맞으며’, ‘방콕에서 주최되는 제5회 불교도연맹대회에 보내는 제의서’, ‘불교에서는 왜 정화운동을 일으켰나’, ‘C선생에게 (C선생은 사학가로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함)’, ‘M친구의 편지를 읽고’, ‘R씨에게’, ‘B씨에게’, ‘반환된 선물을 안고서’, ‘노스님 원고를 베끼고 나서(월송스님)’ 등의 글이 번역 수록하고 있다. 2부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은 ‘공으로 돌아가라’, ‘기도와 염불’, ‘참선과 심득’, ‘영생을 사는 길: 언론인들에게’ 등의 글을 발췌 번역했다.
경완스님은 “일엽 스님의 1962년 저서인 베스트셀러 ‘청춘을 불사르고’는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쉽게 풀어 쓴 책”이라며 “처음에는 비구니의 출가 전 연애담쯤으로 여겼던 이들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하거나 입산하는 일이 많았고, 실제로 수덕사 주지였던 웅산 스님도 일엽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일엽 스님의 출가 전 행적은 세간에 끊임없는 소문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소문은 잇단 사랑의 실패가 출가의 이유라는 것이었다. 특히 속세의 연인을 잊지 못해 법당에 촛불을 켜고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의 가사를 가진 노래 ‘수덕사의 여승’은 일엽 스님을 모델로 삼았다고 알려져 이러한 소문을 더욱 키웠다.
경완 스님은 “일엽 스님의 출가 이유는 본래 자신을 찾고자 함이었지 사랑의 실패는 절대 아니다”며 “스님은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았고, 출가 전 행적도 모두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경완 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을 들은 일엽 스님은 노래 가사대로라면 그 비구니는 타락했음을 직감하고 눈물 진 가사장삼을 벗어 거룩한 승의를 욕됨이 없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이 노래를 감명 깊게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를 회복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중이 많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니 슬픈 일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경완 스님은 “박 교수가 앞으로 일엽 스님의 다른 저서를 더 번역하고 소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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