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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39. 메마른 거리를 밝히는 작고 달콤한 등불 ‘주목 열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11. 5.

매년 이맘 때면 메마른 거리를 밝히는 앙증맞은 등불.

길에서 주목 열매 몇개를 따먹어봤다.

역시나 참으로 달다. 

침엽수가 이런 열매를 맺다니... 참으로 흥미로운 일 아닌가?





[HOOC=정진영 기자] 늦가을의 색감은 갈필(渴筆)로 그린 담채화(淡彩畵)를 닮았습니다. 거리의 화단에선 녹색을 제외한 대부분의 색들이 자취를 감추고, 녹색 또한 지난 계절에 머금었던 물기를 잃으며 바스락 거리죠. 그런 계절에 거리에서 만나는 자연의 원색은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맘 때 메마른 거리를 소소하게 밝히는 원색은 놀랍게도 침엽수의 품 속에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화단에 식재된 침엽수에 매달린 작고 붉은 열매를 보신 일이 있나요? 바로 주목(朱木)의 열매입니다.

서울 후암동 헤럴드경제 본사 부근에서 촬영한 주목 열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주목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상록침엽수입니다. 주목이란 이름은 붉은색을 띠는 나무껍질에서 유래하죠. 주목은 매우 긴 수명으로 유명합니다. 영국 웨일즈 란저니우(Llangernyw)에선 무려 3000살 이상으로 추정되는 주목이 자라고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에도 수령 1400년의 주목이 버티고 있습니다.

주목은 목재로서의 수명도 매우 길다보니 생명을 다한 뒤에도 오랜 세월 동안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킵니다. 등산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한겨울 태백산 정상 부근에서 눈꽃을 피운 주목 군락을 보신 일이 있을 겁니다. 눈꽃을 피운 주목의 상당수는 고사목(枯死木)입니다. 고사목이 피운 눈꽃은 장엄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주목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란 별명을 얻은 이유이지요. 또한 주목은 고산수종이지만 저지대에서도 잘 적응하고 병충해에도 강해, 소나무와 더불어 조경수로 가장 많이 식재되는 침엽수이기도 합니다. 거리의 화단에서 키 작은 침엽수를 목격하셨다면 주목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솔방울을 열매로 매다는 다른 침엽수들과 비교하면 주목의 열매는 매우 독특한 편입니다. 붉게 익는 열매는 겉보기에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홍시처럼 무른 과육이 매우 달콤한 맛을 냅니다. 씨앗이 바깥에서 들여다보이는 열매의 모양도 남다르죠. 

서울 후암동 헤럴드경제 본사 부근에서 촬영한 주목 열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그러나 맛이 좋다고 무작정 열매를 따먹으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주목의 씨앗은 독성을 가지고 있어 발열 및 피부질환을 일으키기 때문에 삼키면 안 됩니다.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선 클라우디우스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선잠이 든 형의 귀에 독약을 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독약이 바로 주목의 씨앗으로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죠.

그렇다고 주목을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毒)과 약(藥)은 한 끗 차이라죠? 맹독이라도 양을 조절하면 약이 되고, 반대로 명약이라도 양을 초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니 말입니다. 주목은 최근 들어 항암물질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산 주목의 껍질과 씨앗으로 유방암과 난소암에 효능을 가진 항암물질인 택솔(Taxol)을 대량 증식할 수 있음이 밝혀져 의학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죠.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맘 때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주목 열매가 새삼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열매 몇 개를 맛보는 정도라면 망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상치 못했던 달콤한 맛의 기억은 정말 오래가더군요. 이 흔한 열매도 때가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