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과 위대한탄생 최희선 형님에 이어 이명의 필자로서 진행한 두 번째 인터뷰이는 한대수 쌤이다.
한대수 쌤은 얼마전 산문집 '바람아, 불어라'를 출간했다.
거칠지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말투에 실린 날카로운 통찰이 책 곳곳에서 엿보인다.
기사 원문은 링크(http://diffsound.com/%ED%95%9C%EB%8C%80%EC%88%98-%EB%84%88%EB%8F%84-%EC%82%B4%EA%B3%A0-%EB%82%98%EB%8F%84-%EC%82%B4%EC%9E%90-%EA%B7%B8%EB%9F%AC%EB%A9%B4-%ED%8F%89%ED%99%94%EB%A1%9C%EC%9B%8C%EC%A7%84%EB%8B%A4/)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대수 “너도 살고 나도 살자. 그러면 평화로워진다”
나이든 아티스트의 이름 앞에 관성적으로 붙는 수식어인 ‘전설’. ‘전설’이란 단어의 어감은 미래보다 과거를 향해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아티스트의 나이에 관계없이 ‘현역’ 앞에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의문이다.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음악, 미술, 저술 등 전 방위에 걸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포크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에게 ‘전설’은 아직 이른 수식어일지도 모르겠다.
한대수가 최근 산문집 ‘바람아, 불어라(북하우스)’를 출간했다. 지난해 자신의 대표곡들의 가사를 인생과 엮어 이야기로 풀어낸 자서전인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을 출간한 이후 1년 만의 신작이다. 그 사이에도 그는 1집 발매 40주년 기념 헌정 앨범 ‘리버스(Rebirth)’에 참여한데 이어 정규 14집을 준비해왔다. 그와 동년배인 아티스트들의 활동상이 미미한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정력적인 행보이다. 지난 7일 서울 창전동 한대수의 자택에서 그를 만나 산문집 ‘바람아, 불어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산문집의 제목 ‘바람아, 불어라’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원래 의도한 제목은 ‘봉사활동’이었다. 정 기자도 알겠지만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봉사활동의 연속 아닌가?(웃음). 편집자는 당연히 그 제목에 반대했지. 고민하던 편집자가 내 대표곡 ‘고무신’의 가사에 담긴 ‘바람아 불어라’를 제목으로 제안했다. 아주 양호한 제목 아닌가? 바로 “오케이(OK)” 했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중 미국에서 머문 세월이 무려 37년이다. 지금도 사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더 익숙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놓은 책이 무려 10여 권에 달한다. 이 같은 저술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정 기자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 연속 12년 째 살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도시에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머무르며 살았던 적이 없다. 물론 양호(한대수의 딸)를 키우느라 자연스럽게 머무르게 된 것이지만 하지만 말이다. 양호를 키우고 먹고 살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며 이런저런 글을 쓰다 보니 한글로 문장을 긴 문장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한글은 영어와는 다른 글의 맛이 있다.
‘바람아, 불어라’에 담긴 주제는 경제, 사회, 국제, 통일 등 실로 다양하다. 마치 바로 앞에서 쉬운 말로 풀어내는 듯한 편안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이는 상당했다. 평소 어떻게 다양한 사회 이슈를 접하나?
어린 시절 내가 자란 할아버지(연희전문 초대 신학대학장과 대학원장을 겸임했다)의 집은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집에는 늘 나 혼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관심은 서재에 꽂힌 수많은 책들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의 비행기 관련 서적,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 등 서재에 꽂힌 책들의 종류는 실로 방대했다. 심지어 나는 10대 때 책으로 여자를 배웠을 정도이다. 나는 사회적 이슈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지식과 철학, 사상 등을 엮어 생각한다. 이는 산문집에 다채로운 주제의 이야기를 어색하지 않게 담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서두부터 돈에 대해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 기자도 알다시피 나는 히피였다. 돈에 대해 신경을 쓰고 살지 않은 세월이 길었다. 그런 생각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계기는 지난 2007년 6월 1일 양호가 태어난 뒤부터이다. 당장 양호가 태어난 첫 날부터 돈이 들어갔고, 아내의 산후조리원 입원, 각종 예방주사까지 모두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나를 도와줄만한 피붙이도 없었다. 그때부터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돈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가장 현실적인 히피로 진화했다.
뮤지션으로 데뷔해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만, 실제로 뮤지션으로 활동한 세월은 사진작가로 활동한 세월보다 적지 않은가? 뮤지션과 사진작가 중 자신의 정체성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한때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진작가이기도 했지만, 사진은 밥벌이를 위한 일이었다. 음악은 한번 빠져들면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내가 사진작가로 일한 이유는 결국 로커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사진이나 미술은 음악에도 매우 도움을 준다. 실제로 음악의 대가들 중에는 미술 전공자들이 많은 편이다. 비틀스의 존 레논과 퀸의 프레디 머큐리도 미술을 공부했고 데이빗 보위와 록시 뮤직도 디자이너로 일한 바 있다. 미술이 없었다면 음악에 전위적인 요소를 더하는 시도도 없었을 것이다.
서슬 퍼런 70년대에 군대 생활을 했을 때에 단 한 차례도 후임들을 구타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해군에서 3년 4개월 복무했는데, 당시에 얼마나 말도 못하게 맞았는지 모른다.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젊은이들을 억지로 끌어와 살인기계로 만드는 과정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확인해보니 내가 작곡한 곡이 약 140곡이었는데, 그중 80여곡이 18~23살 무렵에 나온 곡이다. 비틀스도 수많은 명곡들을 20대 때 만들었다. 당장 나도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기에 군대에 발목이 묶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나. 나는 단 한 차례도 졸병들에게 ‘빠따’를 든 일이 없다. 가뜩이나 강제로 갇혀 있는데,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게 말이 되는가? 첨단 무기가 넘쳐나는 세상에 수십만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장기적으로 모병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문제에 대한 지적도 신랄하다.
정부가 ‘통일대박’이라고 말을 하는데, 과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과 북이 서로 만나지도 않는데 무슨 통일을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통일에 대해 참고할만한 사례는 현재로선 독일뿐이다. 독일은 통일 전부터 몇 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융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당시 동독은 공산권 국가 중 가장 잘 사는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남도 북도 지금처럼 고집을 피워선 안 된다. 교류 없이 통일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연애를 안 하고 결혼하겠다는 말과 똑같다.
폴 매카트니, 스팅, 루이 암스트롱, 린다 매카트니, 신해철, 믹 재거, 데이빗 보위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본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어린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을 클래식이었다. 바하, 베토벤, 벨라 바르토크, 구스타프 말러는 내가 앞으로도 영원히 좋아할 아티스트들이다. 클래식을 제외하면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데이빗 보위 등이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줬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는 환상적이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 비틀스의 멜로디는 지금도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데이빗 보위는 새로운 음의 지평선을 펼쳐 보여줬다는 점에서 내게 특별하다. 후대의 아티스트이긴 하지만 밴드 너바나도 내게 깊은 인상을 줬다. 나는 너바나에게서 맨땅에 헤딩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봤다. 지금의 젊은이들과도 통하는 정서 아닌가?
아티스트의 표절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은 부분에선 다소 유연한(?) 사고가 엿보인다.
우리는 모두 심리적으로 과거의 작품을 카피하고 있다. 클래식에선 그런 부분이 유독 심하다. 당장 베토벤은 바하로부터, 말러는 베토벤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아티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리지널리티이다. 그러나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리지널리티는 의미가 없다.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면서 대중을 사로잡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최근 딸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밝힌 바 있지 않나? 그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에선 별 볼일 없던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가자마자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한국 사회가 워낙 치열한 경쟁 사회이고 체면을 중시하다보니 노파심에 자식들을 채찍질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한국에선 부모들이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강한 것 같다. 자식은 자식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키워야 한다. 내 교육철학은 “내버려 둬”이다. 그런데 너무 내버려뒀더니 버릇이 없어졌다(웃음). 나는 양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산문집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무엇인가?
책에도 언급돼 있지만 “너도 살고 나도 살자”이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남을 죽이고 나만 살기 위해 벌어진 사태가 아닌가? 정치인도, 뮤지션도, 화가도 모두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간디가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비폭력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가 곧 일흔인데 아직도 평화에 대해 잘 모르겠다. 우리 집도 평화롭지 않을 때가 많다. 마누라가 화를 내면 집안 분위기가 싸해진다. 집안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모두들 골고루 적당히 돈을 벌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평화는 돈이다. 내 앨범이 많이 팔리면 평화로워질 것이다(웃음).
정규 14집은 언제 발표할 예정인가?
4월 15일께로 예상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다.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을 비롯해 기타리스트 한상원과 신윤철, 싱어송라이터 최고은 등 세대를 망라한 다채로운 아티스트들이 이번 앨범에 참여한다. 데이빗 보위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 많은 녹음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앞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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