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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57. 근심 많은 여름날에는 ‘원추리’를 만나야 한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6. 6. 16.

본 업무와 상관없이 '식물왕'을 쓴 지 1년 반이 다 돼 간다.

그동안 연재한 기사들의 원고량을 확인해보니 얼추 원고지로 450매가 넘어간다.

조금만 더 연재하면 단행본 하나로 엮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계절이 2개 더 지난다음에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6월 17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여러분은 여름 산행을 해보셨나요?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여름 산행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짜증을 부르는데다, 격하게 산에 오르다 보면 현기증이 일어나 눈앞이 아찔해집니다.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후회막급입니다. 

그러나 발걸음이 능선에 다다라 짙은 녹음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트이면, 후회는 조금씩 감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닿을 것 같지 않았던 봉우리가 현실로 다가오고, 산 아래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장쾌한 풍경이 펼쳐지니 말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짙은 녹음과는 다른 자연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원추리는 이맘 때 산행 중 가장 먼저 색으로 시선을 자극하는 식물입니다.


서울 성수동 중랑천 부근에서 촬영한 원추리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원추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가 원산입니다. 개화기간은 6월 중순부터 8월까지로 여름과 얼추 포개지는데, 뿌리 내릴 곳을 가리지 않아 매년 여름이면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보입니다.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방증하죠. 원추리가 꽃을 피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맹렬합니다. 원추리꽃은 하루만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데, 이 같은 과정이 여름 내내 반복되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원추리꽃은 매일매일 새롭습니다.

원추리는 흔한 만큼 쓰임새도 많습니다. 봄철에 나는 원추리의 순은 ‘넘나물’이라고 불립니다. ‘넘나물’은 봄철 대표적인 산나물 중 하나로 된장국에 넣어서 많이 먹죠. 원추리는 다른 백합과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근경(뿌리줄기)이나 종자로 번식하는데, 원추리의 근경은 녹말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예부터 구황작물로 많이 쓰여 왔습니다. 

원추리는 한자로 ‘근심을 잊게 만드는 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부릅니다. 실제로 원추리의 꽃에는 항우울증 효능을 가진 성분이 포함돼 있다더군요. 항우울증 성분을 차치하더라도 시원스러운 모습의 꽃을 피운 원추리를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을 들뜨게 만듭니다. 

서울 신정동의 한 골목에서 촬영한 원추리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그러나 원추리를 바라보는 일이 마냥 근심을 잊게 만들지는 않는 것도 현실입니다. 원추리는 홑왕원추리, 애기원추리, 각시원추리, 노랑원추리, 큰원추리 등 다양한 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한국의 자생종 원추리(Homeroscallis Coreana)가 지난 193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데이릴리(Daylily)’라는 이름으로 육종 개량이 됐습니다. 오늘날 화단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원추리는 역수입된 ‘데이릴리’입니다. 한국 원산인 수수꽃다리가 미국에서 ‘미스김라일락’으로 개량돼 우리에게 역수입되는 모습과 겹치는 씁쓸한 풍경입니다.

흔하지만 잘 모르고 지나쳤던 원추리. 원추리의 꽃말은 ‘기다리는 마음’ 입니다. 어쩌면 원추리는 우리가 제대로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바라봐 달라는 듯, 쭉 뻗은 꽃대 위에 솟아오른 원추리의 꽃송이를 보면 꽃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