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64. 여름을 화사하게 채우는 이름 모를 연보랏빛 ‘비비추’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6. 8. 4.

여름에 길에서 비비추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도 별로 없는데, 비비추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정말 드물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알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준면 씨가 떠올랐다. 조연배우의 사소한 비애이다.

비비추는 여름의 주연은 아니지만, 거리 곳곳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꽃이다.

이름을 제대로 알고 만난다면 더욱 반갑지 않을까 싶었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8월 5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기자의 아내는 배우입니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 주로 조연으로 얼굴을 비춰왔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합니다. 하지만 조연들의 처지가 대개 그러하듯, 그녀의 이름 석 자까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입장에선 조금 서운한 일이지만, 그녀가 연기했던 역할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녀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확실하게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줬으면 하는 게 기자의 소박한 바람입니다.

기자의 아내와 비슷한 처지인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매년 여름이면 도심과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전국 곳곳에서 피어납니다. 이맘때 길을 걷다 보면 마주치지 않기가 힘들 정도이죠. 매우 익숙한 꽃임에도 불구하고, 이 꽃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비비추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꽃이죠.


대전 비래동의 한 골목에서 촬영한 비비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비비추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원산지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입니다. 비비추는 매년 7~8월에 연한 보라색 꽃을 피웁니다. 야생 비비추의 어린 순은 봄에 나물로도 많이 먹는데, 요즘에는 비비추를 도시의 화단에서 더 흔히 볼 수 있어 야생화보다는 원예종이란 느낌이 더 강하게 들 정도입니다. 이는 그만큼 비비추가 도시에 잘 적응한 식물이라는 방증이겠죠. 

비비추라는 이름은 독특하지만, 그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는 근거 자료는 보이지 않습니다. 꽃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름의 유래를 파악할 도리가 없더군요. 

이에 대해선 몇 가지 ‘썰’이 있습니다. 비비추의 어린 순을 나물로 먹으려면, 독성 제거를 위해 물속에서 거품이 나올 때까지 어린 순을 비벼야 합니다. 곰취, 참취 등 우리가 흔히 먹는 나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취’이지요. ‘취’에서 변형된 ‘추’라는 단어 앞에 비빈다는 의미를 가진 ‘비비’가 결합해 비비추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썰’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린 순이 비비 꼬인 채로 말려 돋아나기 때문에 ‘비비’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는 ‘썰’도 보이더군요.

아무리 흔한 꽃이어도, 이름을 알고 만나는 꽃은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꽃보다 훨씬 더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비록 ‘썰’이지만 이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비비추라는 낯선 이름을 쉽게 잊긴 어려울 겁니다.


서울 여의도의 한 화단에서 촬영한 비비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비비추의 꽃말은 ‘좋은 소식’, ‘하늘이 내린 인연’ 입니다.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일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거리를 화사하게 물들이는 비비추다운 꽃말입니다. 앞으로 자주 만날 꽃이라면, 서로 통성명을 하고 만나는 것이 더욱 반갑지 않을까요? ‘좋은 소식’과 ‘하늘이 내린 인연’은 약간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더군요. 기자가 아내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처럼.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