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설 단상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8. 2. 17.

<설 단상>


1. 이번 설에 대전 본가에 가서 내가 쓰던 방을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정리했다. 방이 텅 비어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건을 내다버렸다. 버리는 와중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물건도 다수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2.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내가 'X밥'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공부를 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시절 일기장에 담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녀석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치른 시험에서 실은 내가 'X밥'이었음이 바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치른 시험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학교 때엔 나름 전교에서 1자리 등수에서 놀았는데, 고등학교에선 100위 밖을 벗어났다. 알고 보니 반 친구들 중에 국민학교, 중학교 때 신동 소리 안 들어본 녀석이 없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짜 똑똑한 녀석들이 고등학교에 와보니 있었다. 대단할 것 하나 없는 평준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나는 딱 그 정도인 녀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쓴 일기에는 그로 인한 혼란과 절망(?), 3년 간에 걸쳐 내가 'X밥'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드러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경험은 이후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 "나는 'X밥'이다"란 생각을 늘 머릿속에 담고 있으니, 무엇을 하든 남의 눈치를 보지도 결과를 기대하지도 않게 됐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니, 지르는 일도 편해졌고 좋은 결과도 오히려 더 많이 나오게 됐다. 결과적으로 고등학교 때 'X밥'이 돼 다행이다. 심각하게 우울한 내용이 담긴 내 고교 시절 일기장으로 보며 여러번 피식했다.


3. 방 정리 도중 나는 어머니의 일기장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다. 1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유품 대부분(이라고 쓰고 몇 되지 않는)이 소각됐지만, 나는 그 중에서 어머니의 일기장 몇 권을 발견해 챙겼다. 얼마전 나는 겨우 어머니의 일기장을 완독했는데, 그녀가 30~40대 시절에 쓴 일기장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그때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인지, 내가 챙기지 못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11년 전 일기장을 수습하긴 했지만, 제대로 챙기지 못한 셈이다. 이번에 발견한 일기장에는 어머니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간헐적으로 쓴 일기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35~43세 무렵에 쓴 일기였다. 나는 다음 장편소설에 어머니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을 생각인데, 중요한 1차 자료를 이번 기회에 챙겼다.


4. 집에 있던 법서를 모두 버렸다. 이미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정리하며 쌓아보니 아직도 내 키를 훌쩍 넘길만큼 많은 법서가 남아 있었다. 사법시험 공부를 그리 길게 하진 않고 접은 편인데, 책들을 살펴보니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집에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부를 끝까지 이어 갔을 듯하다. 생각보다 법 공부가 적성에 꽤 맞았고 재미있었던 터라. 더 나를 지원했다가는 내가 물귀신이 돼 집안을 거덜낼 상황이라, 경제활동에 뛰어드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집안을 거덜내면서도 내가 잘 될 것 같다는 확신도 없었고.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았는지, 가끔 본가로 왔을 때 책꽂이에 꽂힌 법서가 보이면 마음이 싸해졌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겠지.


5. 책상 속에 굴러 다니던 이름 없는 CD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우울한 고등학교 시절에 만든 모든 자작곡들을 발견했다. 다시 들어보니 조악하고 유치해서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재미있었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에 한참 빌게이츠를 꿈꾸며 만들었던 프로그램 소스도 대거 발견했다. 퀵베이직 4.5로 만든 소스도 있었고, 터보 C와 어셈블리로 만든 소스도 보였다. 도대체 무엇을 만들었던 걸까. 나중에 DOSBOX를 설치해 실행해 봐야겠다. 초등학교 때 가지고 놀던 화약과 수류탄도 발견됐다. 초등학교 시절에 컴퓨터 잡지에 프로그램 소스를 보냈던 흔적도 발견됐다. OMG...


6. 청소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많은 방해물들을 정리하는데 꽤 도움을 주는 작업이다. 혹시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다면 청소를 추천한다. 많은 물건을 여러 차례 내다버렸더니, 허리가 아파 누워있는 건 자랑할 게 못 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