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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내 첫 컴퓨터의 흔적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8. 2. 18.



8088 CPU.

20년 만에 본가에서 방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IT 유물이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컴퓨터는 삼성 SPC-3100S.

첫 컴퓨터라 모델명까지 기억하고 있다.

1992년 가을, 집 근처 컴퓨터학원이 노후 컴퓨터를 중고로 대거 처분하고 있었다.

가격은 대당 10만 원. 부모님은 싼 맛에 그 중 아무 컴퓨터를 하나 구입해 내 방에 놓으셨다.

 

사양은 이른 바 XT(IBM PC 규격 중 하나)였다.

CPU8088 10Mhz, 램은 640KB, 그래픽 카드와 모니터는 CGA, 보조기억장치는 5.25인치 드라이버 2개로 당시로서도 한물간 모델이었다.

생산년도도 기억에 남아있는데 1988년이었다.

4년 동안 컴퓨터 학원에서 쓰인 물건이니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다.

아버지는 본체를 열심히 닦으셨지만, 오랜 시간 동안 본체에 묻은 수많은 수강생들의 손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화면에 초록색 글씨로 뜬 "A:\"란 문자 앞에서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으로 갖게 된 컴퓨터는 신세계였다.

오락실에 비해선 구렸지만 동전이 없어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너구리, 고인돌, 보글보글 등등. 덕분에 스페이스 바 키가 얼마 못가 너덜너덜 해졌다.

 

이 고물 컴퓨터는 1997년까지 집에 있었다.

이미 멀티태스킹이 완벽하게 이뤄지는 윈도우즈 95가 대중화된 세상에서, 하드디스크도 없는 고물컴퓨터는 부피만 차지하는 골칫덩이였다.

이 물건을 버리기 직전에 나는 컴퓨터 본체를 열어 CPU를 찾아 제거했다

컴퓨터의 생명인 CPU를 지니고 있으면앞으로도 첫 컴퓨터에 대한 추억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CPU를 잃은 고물 컴퓨터는 바로 고물상으로 향했다.


CPU에는 인텔(Intel)이 아닌 지멘스(SIEMENS)란 이름이 상단에 새겨져 있었다.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멘스는 AMD와 더불어 인텔로부터 라이선스를 얻어 8088 CPU를 생산했었다

당시엔 내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지.

 

이후 20년 넘게 CPU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이번 설에 방 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다.

내 첫 컴퓨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니... 기분이 묘했다.

앞으로 잘 보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