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비틀고 마음 움직인 ‘가사 한 줄’의 힘
이주엽 ‘이 한 줄의 가사’ 출간
아침이슬·행진 등 41곡 분석
고래사냥, 청춘의 숨통 틔워줘
모여라, 勤勉에 유쾌한 돌팔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희망을 상징하는 가사로 1970∼1980년대 청년 문화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심지어 이 노래는 1990년대 북한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다가 금지곡이 됐다고 알려졌다. 좋은 가사의 힘은 이처럼 이념과 체제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다. 좋은 가사는 그 자체로 좋은 문학이기도 하다. 운율을 품은 가사는 시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서사를 이뤄 짧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
미국 포크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가사의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가 쓴 가사 비평집 ‘이 한 줄의 가사’(열린책들)는 좋은 가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때로는 통렬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배호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들국화의 ‘행진’,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싸이의 ‘챔피언’, 아이유의 ‘가을 아침’ 등 세대를 아우르는 히트곡 41곡의 가사를 골라 가요사적 의미와 감성의 계보, 시대적 배경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저자는 뛰어난 가사는 시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새로운 감성을 연다고 강조한다. 송창식이 노래하고 최인호가 작사한 ‘고래 사냥’에 대해 저자는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는 후렴구 덕분에 1970년대 군부 독재하에서 숨죽이던 청춘들이 ‘정신의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들국화가 부른 ‘행진’의 가사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에서 저자는 불운과 시련마저 축복으로 삼겠다는 청춘의 결기를 읽는다. 이념과 도덕적 엄숙주의에 억눌린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예고하는 뜨거운 외침이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송골매의 ‘모여라’의 가사 ‘회사 가기 싫은 사람/장사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에 대해 저자는 1990년대 개발도상국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근면의 세계’에 던지는 유쾌한 돌팔매질이었다고 말한다. 혁오가 노래한 ‘톰보이’의 가사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 가는데”에서 저자는 행복과 자아실현을 기약할 수 없는 요즘 청춘들의 신산한 삶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한국 가요사에 획을 그은 아티스트들을 향한 헌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북한강에서’를 부른 정태춘을 “한(恨)과 그리움의 토착적 정서를 독보적으로 그려 온 싱어송라이터”로 정의한다. 조동진에 대해선 “한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운문의 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한 음악가”, 하덕규에 대해선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던 음악가”라고 찬사를 보낸다.
저자는 가사 비평과 함께 해당 가사와 곡이 실린 앨범을 소개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좋은 앨범에서 좋은 가사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앨범 소개에는 음악가들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들, 음반의 제작 배경,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레이블, 저자 자신이 곡을 주거나 인연을 맺은 음악인들의 소소한 일화 등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담겨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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