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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솔직하지만 ‘차가운 현실’… 냉정하지만 ‘따뜻한 위로’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0. 2. 25.





- 권여선 작가, 4년만의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

아내 잃은 남성과 딸의 서먹함

빚에 허덕이는 스물 한 살 여성

차별·배제 노출된 기간제 교사

김애란 “비정해서 오히려 공정”


권여선 작가가 4년 만에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을 내놓았다. 권 작가의 소설에 으레 등장하는 술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술 대신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흘린 땀과 눈물이 그 자리에 고여 있다. 맛깔나는 술자리 묘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소주의 비릿한 단내만큼이나 체취가 어린 짠내도 매력적이니 말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제19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모르는 영역’을 비롯해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권 작가는 어설픈 위로를 전하는 대신 현실을 직시한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모르는 영역’은 아내를 잃은 중년 남성과 딸의 서먹한 관계를 통해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관계의 단면을 포착한다. 권 작가는 살갑진 않아도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부녀의 모습을 그리며 한 걸음 더 관계를 발전시키는 길은 솔직함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빚에 허덕이면서 모아야 할 돈을 백 원 단위까지 계산할 수밖에 없는 ‘손톱’의 주인공인 스물한 살 여성에게 할머니는 그저 조심하라고 말할 뿐이다. 일하다가 사고로 오른손 엄지손톱이 절반 가까이 날아가 통증을 느끼면서도 일을 해야 하고, 500원 더 비싸다는 이유로 매운 짬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아울러 권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조금 낯선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문제의식을 넓히고 다채로운 서사를 선보인다. ‘희박한 마음’의 주인공인 레즈비언 할머니는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 늘어난 요즘에도 낯선 인물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오래전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함께 담배를 피우던 연인이 남학생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복기하며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너머’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기간제 교사가 쪼개기 계약과 계약 연장 등 차별과 배제에 노출되는 모습을 통해 삶이 어디까지 슬퍼질 수 있는지 파고든다. ‘재’의 주인공은 심각한 질환으로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도 식당 주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려고 한다. 애잔하고도 안쓰러운 풍경들이다.

권 작가는 종종 집요해 보일 만큼 현실을 그대로 묘사해 보여주는데, 이런 태도가 역설적으로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이번 소설집에 추천사를 보탠 김애란 작가는 “비정해서 공정한 눈이란 이런 걸까”라고 물으며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설집을 덮은 뒤 읽으면 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추천사다.

소설집 제목은 ‘손톱’의 등장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나왔다. 권 작가는 소설집 끝에 실은 ‘작가의 말’에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소설집 제목과 ‘작가의 말’ 사이의 행간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의 시작은 세상을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냐는 의미로 읽힌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