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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인맥의 허상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0. 6. 26.

 

●휴대전화 번호를 20년 만에 바꾼 후 문득 들은 잡생각이다.


●피처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스마트폰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며 옮기는 동안 놀라움을 느꼈다.
첫째, 이렇게 많은 전화번호가 피처폰에 저장돼 있는지 몰랐다.
둘째,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의 번호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셋째, 저장된 번호를 수십 명으로 줄여도 내 삶에 별로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TV 리모컨을 눌렀다.
이리저리 돌아가던 TV 채널은 SBS 예능 프로그램 '맛남의 광장'을 재방송하는 채널에서 멈췄다.
백종원이 함영준 오뚜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완도 다시마를 팔아달라고 부탁하고, 함 회장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왔다.
백종원은 지난해 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강원도 못난이 감자를 팔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방송임을 고려하더라도 놀라운 모습이었다.


●정말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 자기 입으로 인맥을 자랑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맥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못났다고 여기는 사람을 인맥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맥은 자신이 그 인맥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나 능력을 갖추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인맥은 '아는 사람' 혹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 불과하다.
백종원은 함영준 회장과 군대에서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군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 인연이 인맥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백종원이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함 회장과 군대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인맥 자랑은 어떤 형태이든 허랑한 일이다.


●저장된 번호를 살펴보니 고위층,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꽤 많았다(심지어 문통 번호도!)
대부분 기자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이다.
나름의 기준에 따라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첫째,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번호
둘째, 내가 기자가 아니라면 전화를 걸기 어려운 사람의 번호
셋째, 내가 기자가 아니라면 전화를 걸지 않을 사람의 번호
1000명 이상의 번호가 목록에서 지워졌다.
그 빈자리에서 '자연인' 정진영의 보잘 것 없는 인맥이 드러났다.


●돌이켜보니 나도 여기저기서 인맥 자랑을 꽤 많이 하고 돌아다녔다.
그들 중 이제 기자가 아닌 나를 상대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술자리에서 누구누구를 잘 알고 친하다고 떠들고 다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술김에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하는 척하며 주위에 인맥을 과시한 일도 적지 않았다.
아... 참 못났네.
고작 휴대폰을 바꾸고 전화번호부를 정리한 것뿐이지만, 새 출발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야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자연인'이란 사실이 실감이 난다.
언제까지 '자연인'으로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인맥 자랑은 하지 않는 아재가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