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신춘문예 업무를 맡으며 경험한 일들에 관한 이런저런 잡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12. 26.

 문학 담당 기자를 맡은 후 처음으로 신춘문예 업무를 진행해 당선자 연락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번 당선자들은 내가 신춘문예를 맡은 뒤 처음 맞는 당선자들이라 느낌이 남다르다.

 당선자들이 앞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하는 문인이 되길 빈다.

 당선자들이 정말! 진짜! 레알! 잘 됐으면 좋겠다.

 나와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잘 되기를 이렇게 진심으로 바라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각설하고 신춘문예에 관한 이런저런 썰을 풀어보려고 한다.

 나는 신춘문예 응모와 신춘문예 공모 업무를 모두 경험해 본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응모자의 마음도 알고, 공모 담당자의 마음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신춘문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푸는 썰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1. 문학이 죽은 시대라고 하지만, 문인을 꿈꾸는 사람이 정말 많다. 접수된 시가 수천 편, 단편소설과 동화가 수백 편이 넘는다. 응모작이 들어 있는 봉투를 뜯는 일이 이렇게 고된 작업일 줄은 몰랐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싱가포르, 그리스 등 해외에서 접수된 원고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당선돼도, 문인으로서 성공은커녕 단행본 한 권 내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신춘문예의 효용성에 줄곧 의문을 가져왔는데, 이번에 신춘문예를 치르고 그 생각을 접었다. 신춘문예는 단순히 신인을 선발하는 행사가 아니라 대국민축제였다. 경쟁률이 말도 안 되게 높지만, 우리나라에 이렇게 공정한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대결이 또 있는가 싶다. 그에 관해선 다음 단락에서 말한다.


 2. 신춘문예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대결 중 가장 공정한 대결이었다. 모든 원고는 철저하게 인적사항을 블라인드로 처리해 예심위원들에게 분배된다. 응모작에서 인적 사항이 적힌 앞장을 뜯어내는 일도 고역이었다. 그런데 응모작들을 보면 별의별 꼼수가 많이 눈에 띄었다. 인적사항이 앞장뿐만 아니라 맨 뒷장에도 첨부된 경우가 다반사였고, 심지어 각 장마다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은 응모작도 꽤 있었다. 누가 심사위원이 될 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자신과 인연이 있는 심사위원이면 눈여겨 봐주길 기대하는 꼼수다.

 이런 꼼수는 철저히 통제된다. 나는 그런 응모작이 보이면 사인펜으로 철저히 이름을 가려서 심사위원에게 보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완전하진 않은 터라, 간혹 몇몇 응모작은 완전히 인적사항을 가리지 못한 채 심사위원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 원고는 심사위원이 자체적으로 거른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자를 자신의 얼굴로 여기므로, 절대 인연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원고가 보이면 바로 그 자리에서 걸러버린다는 심사위원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정말로 냉정하다. 혹여나 심사위원이 엉뚱한 마음을 먹더라도, 다른 심사위원이 함께 응모작을 검토하기 때문에 견제가 이뤄진다. 

 가장 중요한 사실! 꼼수를 벌인 응모작치고 수준 높은 작품은 없다. 꼼수에 신경 쓰지 말고 응모작에만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


 3. 말도 안 되는 수준을 가진 작품이 당선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된다. 물론 심사위원의 성향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A 언론사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면 당선됐을지도 모를 작품이 B 언론사에 응모해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건 안타깝지만 운의 영역이다. 

 하지만 본심에는 어떤 응모작이든 수준 이하인 작품이 오르진 않는다. 대진운이 좋지 않아 탈락했다고 아쉬워할 순 있어도, 내 응모작이 당선작보다 수준이 높은데 왜 탈락하느냐고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시간에 작품 하나를 더 쓰는 게 건강에 좋다. 심사위원들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운다. 단 하나의 응모작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는 이 정도로 심사위원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줄은 몰랐다. 실력을 가진 사람이 운이 나빠 탈락할 순 있어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운이 좋아 당선될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다.


 4. 트렌드만 쫓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 신춘문예 응모작에는 당대 한국 문학계의 경향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응모자들이 참고하는 작품은 당대에 가장 관심을 모으는 작품일 테니 말이다. 현재 한국 문학계에선 페미니즘, 퀴어 서사, SF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응모작들 역시 이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매우 많았다. 이는 서로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쓰지 않는 이상, 심사위원 입장에선 신선할 게 없다. 이번 당선작 중에도 대놓고 트렌드를 쫓은 작품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응모작 중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뽑지 ‘핫한’ 작품을 뽑진 않는다.


 5. 마지막으로 신춘문예 업무를 맡으며 경험한  천태만상을 소개한다. 신춘문예 공모 안내를 제대로 읽지 않는 응모자가 지나치게 많아 놀랐다. 마감 일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놓고 따지는 응모자, 왜 수필은 받지 않느냐는 응모자, 접수 마지막 날에 접수 기한을 연장해달라고 읍소하는 응모자까지 별의별 응모자가 많았다. 심지어 심사위원이 누구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응모자도 있었다. 어떤 응모작에는 당선 소감이 함께 들어있었다. 당선작은 자신의 작품뿐이라는 호연지기에 전율했다. 시 부문 응모작의 경우 재소자들이 보내는 작품이 많은데, 그 중에 자신에게 원고지를 보내면 시를 써서 보내주겠다고 딜을 쳤던 재소자가 떠오른다. ‘설리’라는 제목의 시 원고에 설리 사진을 정성스럽게 붙인 응모자도 있었다. 어떤 응모자는 자신의 석사 논문을 시 응모작으로 보내 나를 놀라게 했다. 논문도 시라는 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