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목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앞에선 짐작이 모두 빗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피아노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편집자여서 짜게 식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이거나, 출판사 관계자이거나, 대학 관계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작가들의 경험치와 시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짜게 식었던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피아노 조율사로 전직을 준비하는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직업 묘사가 대단히 디테일해 놀랐다.
나는 피아노는 몰라도 기타는 오랫동안 만져왔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기타 조율 과정을 떠올렸다.
기타를 조율하는 방법으로는 레귤러 튜닝, 하모닉스 튜닝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조율 방법은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레귤러 튜닝이다.
먼저 기타의 5번 줄 개방현을 A(라)음으로 맞춘다.
6번 줄 5프렛과 5번 줄 개방현, 5번 줄 5프렛과 4번 줄 개방현, 4번 줄 5프렛과 3번 줄 개방현, 3번 줄 4프렛과 2번 줄 개방현, 2번 줄 5프렛과 1번 줄 개방현의 음정을 맞추면 조율이 끝난다.
여기에 하모닉스 튜닝을 더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조율할 수 있다.
기타 줄 위 특정 지점에 가볍게 손가락을 댄 채 줄을 튕기면서 바로 손가락을 떼면, 프렛을 눌렀을 때와 다른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튜너(비싸지도 않다)를 쓰면 간단히 순정률에 맞춰 조율할 수 있는데, 그렇게 조율한 뒤 코드를 잡고 기타 줄을 쓸어내리면 미묘하게 음정이 맞지 않아 귀에 거슬릴 때가 있다(주로 싸구려 기타가 그렇다).
그럴 때는 하모닉스 튜닝으로 조율하면 음정이 맞춰지곤 한다.
각각의 줄이 들려주는 음정은 정확한 음정에서 미세하게 벗어나 있는데, 희한하게도 정확하게 순정률에 따라 조율했을 때보다 조화를 이룬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 인물 모두 적당히 망한 사람이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벼랑 끝에 내몰린 게 아니라, 절망하지 않을 만큼만 무너진.
이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만큼의 수준만 무너진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심리를 피아노 조율에 빗대 섬세하게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 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해서 친근하면서도 때로는 가여웠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삶이란 결국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테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그러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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