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안목을 갖고 있으면 종종 괴롭다.
대놓고 좋은 안목을 갖고 있다고 말하니 살짝 민망하지만, 나는 좋은 건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그래서 괴롭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부지런히 방구석에서 음악을 만들다가 포기한 이유도 이 안목 때문이었다.
많이 듣고 만들어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어떤 음악이 좋은지 동물적으로 알겠는데, 나는 그런 음악을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작가로서도 이 안목 때문에 괴롭긴 마찬가지다.
많이 읽고 쓰다 보니 어떤 글이 좋은지 바로 감이 오는데, 나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하니 말이다.
최근에는 내가 이도 저도 아닌 무가치한 작가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밥벌이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여기서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들고.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위로가 되는데, 누군가 함께 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란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고 느꼈을 때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실패한 사람을 상담하는 사람이 경험한 실패, 가족 공동체의 실패, 공들여 준비한 자살마저 실패, 실패를 연구하는 사람의 실패 등 다채로운 실패담을 담은 이 인터뷰집이 적어도 읽는 동안에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기분을 느끼며 살고 있진 않음을 깨달으면 덜 외로워지니 말이다.
작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왓 어 원더풀 월드』가 실패한 뒤 깊은 열패감을 느꼈다.
단독 저서를 10권쯤 쓰면 내 차례도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오랫동안 해왔는데, 10권째에도 달라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쓴 장편소설 중에서 취재에 가장 공을 들였던 데다, 기대 이상으로 잘 뽑힌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스크래치가 정말 많이 났다.
인터뷰집을 읽다가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의 말이 꽤 힘이 됐다.
"실패했다고 슬퍼하거나 기분 나빠할 겨를이 없어요. 오히려 실패하지 않는 걸 좋게 보지 않죠. 그만큼 도전해 보지 않았다는 거니까."
돌이켜보니 안목이 나를 괴롭게만 하진 않았다.
신문사에서 음악 기자로 일할 때 그랬다.
음악을 들으면 바로 감이 오니까 아무리 신인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이어도 발 빠르고 자신 있게 인터뷰를 섭외하거나 앨범을 소개할 수 있었다.
잔나비를 비롯해 여러 뮤지션(준면 씨도 여기에 포함된다)이 인터뷰로 만난 첫 기자가 나였고, 그들 상당수가 나중에 한국대중음악상에 이름을 올리거나 명실상부한 스타가 됐다.
언젠가는 내 작가 경력에도 이 안목이 힘이 돼주지 않을까.
책을 덮을 때쯤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시도'라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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