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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대중음악 기자로 보낸 2년의 시간에 대한 제 점수는요?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4. 12. 15.

매년 12월은 회사의 정기인사가 있는 달이다.
발표일까지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는 인사의 특성상 내 거취도 현재로선 불분명한 미래다.
부서 이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대중음악 기자로 보낸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문득 지난 시간들을 짧은 글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내가 대중음악을 담당하게 된 것은 2012년 가을부터다.
그때부터 기간을 계산하면 내가 대중음악 담당기자 행세를 하고 다닌 시간은 만 2년 정도다.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하며 다짐했던 것은 ‘세상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기자가 되자’였다.


아랫사람이건 윗사람이건 어느 시간에 누구를 만나도 이상할 게 없고, 대접하기보다 대접 받을 일이 많은 게 기자의 특징이다. 오래 기자생활을 하게 되면 특유의 ‘갑질’이 몸에 배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기자와 경찰, 노숙자가 함께 밥을 먹으면 노숙자가 계산을 한다”는 뼈 있는 농담이 떠돌겠는가.


또 어느 정도 기자로서 인지도와 영향력이 생기면 주제를 모르고 거만함이 몸에 배는 경우도 많다. 이 바닥에서 그런 기자들을 꽤 많이 봤다. 어차피 기자 명함 사라지면 아무 것도 아닌 게 기자인데, 그 자리에 있을 때에는 그 사실을 너무 모른다. 개똥철학이지만 나는 ‘기자는 가장 하찮은 사람’이란 생각을 늘 머릿속에 품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자리다.


나는 늘 ‘갑질’을 경계했다. 나는 되도록 대접 받을 자리를 피해 다녔다. 덕분에 업무 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기획사나 업자들이 별로 없다. 가능한 한 다른 기자들과 마주치는 일도 피했다. 셀프디스이지만 기자들은 그리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족속들이 아니다. ‘기자는 펜을 든 깡패’라는 생각은 지난 5년여 동안의 기자 생활로 인해 생긴 편견인데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그런 족속들일지 모르지만...


대신 철저히 뮤지션들을 1대1로 상대하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셨다. 기획사 측 사람이나 홍보 담당과 백날 이야기해봐야 부서 바뀌면 인연도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은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기자가 되자’란 목표와 초심은 거의 지켰다고 자부한다. 취재원의 사회적 지위 경중에 관계없이 나는 최대한 자세를 낮춰 그들 모두를 똑같이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많은 뮤지션들과 기자와 뮤지션 관계를 넘어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중 한 명과 결혼까지 하게 됐다) 나는 내가 상대하기 편하고 만만한 기자가 됐다고 자평하고 있는데,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하나 내가 다짐했던 것은 ‘평론가 흉내를 내지 말자’였다.


나는 기자이기 전에 소설가이다 보니 주변 선배들로부터 종종 “기사를 소설로 쓰지 말라”는 농담을 자주 들었다. 이 농담은 내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나는 내 기사에서 주관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내 기사를 데스킹하는 선배들로부터 매우 차갑고 건조한 문장을 쓴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중음악은 객관적인 시각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대상이다. 취향과 장르는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팩트라고 생각하며 기사로 전달하는 내용이 누군가에겐 팩트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은 스트레이트 형식의 기사로 내용을 전달하기에 부적절한 취재 대상이다.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주관을 기사에 담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순간 어쭙잖게 평론가 흉내를 내게 된다. 머릿속이 꽤 복잡해졌다.


아무리 음악을 잘 아는 기자일지라도 주관에 기대어 기사를 쓰는 순간, 그 기사는 어설픈 리뷰가 돼버린다. 기자의 리뷰가 문제될 게 무엇이냐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자는, 최소한 일간지 기자는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 기사를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스마와리를 돌며 백날 깨지고 배운 게 그것 아닌가. 기자는 평론가가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고민 끝에 나는 내 나름대로의 기사 형식인 ‘리터뷰(Reterview)'를 만들었다. 이름만 거창하지 사실 별 것 아니다. 리뷰(Review)를 하고 싶은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그 앨범을 만든 뮤지션의 인터뷰(Interview)를 통해, 즉 그들의 입을 빌려 기사로 전달하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형식의 기사라면 내가 생각하는 기자의 역할과 그리 많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나는 소개하고 싶은 앨범들이 많았다. 방법은 그 앨범을 만든 뮤지션들을 많이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나는 이 바닥에서 뮤지션들을 가장 많이 인터뷰하고 돌아다니는 기자가 됐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내가 ‘평론가 흉내를 내지 말자’는 초심을 잘 지켰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나는 자주 초심을 깨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종종 내 기준에 따르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초심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내 지난 2년 동안의 점수를 스스로 매기자면 ★★★(별 5개 만점)이다. 너무 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