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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나는 과연 익숙함에 속지 않으려 애 쓰고 있는가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2. 15.

최근 내 거취에 변화가 있을 뻔했던 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결론이 쉽게 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취에 변화가 생기면 결코 지금처럼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은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이뤄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경록절에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한 선배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선배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내 선택에 의문을 제기했다. 문득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나는 혹시 익숙함에 속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일상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와 같은 사소한 선택부터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나?”와 같은 중차대한 선택까지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것은 매순간의 선택들이니 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내가 직면했던 수많은 선택들 중 내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6년 전 두 번째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을 집필하기 위해 북한산 보덕사에 칩거했던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4년 전 내 첫 직장이었던 충청투데이를 떠나 헤럴드경제로 옮긴 일이다.


내가 4년 전 충청투데이를 떠날 때 내 발목을 끝까지 붙잡은 것은 조직과 조직원들에 대한 애정이었다. 요즘 세상에 '노예' 소리를 들을 말이지만, 나는 충청투데이로 출근하는 일이 늘 즐거웠었다. 조직원들 사이의 관계는 끈끈했고(적어도 내가 속한 부서는 그랬다), 분위기 역시 다른 직장과 비교해 매우 가족적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과 추억을 충청투데이에서 쌓았다. 특히 충청투데이에서 우희철 사진부장(현 라오스 거주), 나재필 편집부국장과 팀을 꾸려 함께 여행기사를 만들었던 2010~2011년 사이의 1년은 앞으로도 평생 그리울 시간들이다. 셋의 호흡은 정말 환상이었다. 게다가 두 선배는 한국 최고의 생태사진전문기자와 신문 편집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휩쓸었던 편집기자였다. 신입기자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패기만만한 신입기자를 애정으로 봐준 두 선배의 아량이 정말로 넓었음을 뒤늦게 실감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재미있게 일을 할 날이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지역지에선 분명히 한계가 존재했다. 말 그대로 지역지는 ‘지역’을 위한 신문이니 말이다. 당장 나와 결혼을 약속한 준면 씨만 해도 내가 지역지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면 만날 인연이 없었을 사람 아닌가.




오늘 아침에 방송된 KBS 2TV ‘영상앨범 산’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2년 전 라오스로 이민을 떠난 우희철 부장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라오스 푸카오쿠아이 국립공원을 소개하며 산에 오르는 우 부장의 모습은 마치 영상편지 같아 정겹고 애틋했다.


2년 전 나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 땅에서 과감하게 모든 것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우 부장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내 좁은 눈으로는 산으로 뒤덮인 아득한 곳에서 우 부장이 과연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을 보니 그것은 건방진 걱정이었다. 우 부장은 나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이었고 또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눈에선 확신이 엿보였다. 돌이켜보니 보름달만 떠있으면 야간산행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게 몸으로 알려준 사람도 우 부장 아닌가.




이 사진과 액자는 우 부장이 4년 전 직접 촬영해 헤럴드경제로 떠나는 내게 준 선물이다. 먹이를 움켜쥐고 날아가는 매... 내가 서울에 자리를 잡은 뒤 이 사진은 늘 내 방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 부장은 내가 헤럴드경제에서 저 매처럼 살아가길 바랐다. 내 마음 속 저 사진의 배경음악은 Helloween의 ‘Eagle Fly Free'이다. 일이 힘겹게 느껴지고 주변상황이 만만치 않을 때마다 나는 한참동안 이 사진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덧 내가 헤럴드경제에서 머문 시간이 충청투데이에서 머문 시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난 우 부장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말해준 가르침과 위로를 잊을 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최근 내 거취에 변화가 있을 뻔한 일이 있었지만,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서두에 언급했지만, 거취에 변화가 생기면 결코 지금처럼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내가 익숙함에 속지 않았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다. 우 부장은 저 아득한 라오스 땅에서도 변변치 못한 후배를 가르치고 있었다.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에 속지도, 다가오는 변화도 두려워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