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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4. 춥고 메마른 땅에 눈처럼 내리는 꽃 ‘설강화’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2. 20.

사실 난 음악 기사보다 '식물왕'을 쓰는 일이 더 즐겁다.

반은 장난으로 시작한 기획인데 주객전도가 됐다.

음악기자는 무슨... 자연이 최고!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겨울과 봄의 문턱에서 봄의 징후는 바람으로 먼저 느낄 수 있습니다. 2월 막바지의 바람에는 봄의 훈기가 살짝 스며들어있습니다. 봄을 닮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면, 몸 깊숙이 박혀 빠져나올줄 모르던 한기도 슬그머니 발을 빼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시장 곳곳에선 이미 속이 노랗게 자란 봄동 판매가 한창입니다. 봄동은 겨울에 자랐지만 그 아삭한 식감과 상큼한 맛에는 봄의 지문이 날인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은 봄을 예비하는 계절입니다. 2월이면 춥고 메마른 땅을 뚫고 고개를 드는 설강화(雪降花)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부지런한 봄의 전령사입니다.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수목원에서 촬영한 설강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유럽 원산인 설강화의 본명은 그리스어로 우유를 의미하는 ‘갈라(gála)’와 꽃을 의미하는 ‘안토스(ánthos)’를 합친 갈란투스(Galanthus)입니다. 설강화는 봄이 오기도 전에 피우는 꽃의 모양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닮아 스노드롭(Snowdrop)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명보다 별명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듯, 갈란투스보다 스노드롭이나 설강화란 이름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tvN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 ‘쓰레기’를 본명 ‘김재준’으로 부르는 일이 어색하듯, 가느다란 줄기로 영롱한 꽃을 매달고 하늘거리는 이 꽃을 설강화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이 통한 걸까요? 설강화를 가리키는 국제어 에스페란토 단어는 ‘neborulo’로 ‘눈을 뚫는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척박한 계절을 헤치고 피어난 설강화는 봄의 많은 풍경들을 상상하게 합니다. 연둣빛으로 곱게 물든 산하, 온갖 색으로 피어난 들꽃들, 그 위로 쏟아지는 바삭바삭한 햇살……. 설강화의 꽃말은 ‘희망’입니다. 또한 설강화는 1월 1일의 탄생화이기도 합니다. 설날이 지나고 나니 이제야 새해를 실감합니다. 지난해 온갖 대형사고가 이어졌던 와중에도 우리는 밥 한술을 넘기기 위해 얼마나 뜨거운 삶을 치러내야했던가요. 그 뜨거운 삶이 새해엔 감동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굴하지 않는 저 작은 꽃처럼.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