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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거침없이 교외를 덮쳤다. 차창 밖 풍경은 부여에 가까워질수록 갈필(渴筆)로 그려진 수묵화를 닮아갔다. 도심의 잠열 앞에서 머뭇거렸던 겨울은 외곽도로를 따라 교외로 몰려들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마른 잎을 떨군 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소리가 스산했다. 바람은 북에서 남으로 하루살이처럼 떨어지는 낙엽을 쓸어갔다. 바야흐로 소멸의 계절이다.
무량사(無量寺)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과 보령시 미산면 사이에 솟은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의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대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문무왕은 7세기의 왕이고 범일은 9세기의 승려다. 혹자는 창건시기를 9세기 문성왕대로 잡으나 차령산맥 끝자락에서 유장한 세월로 다듬어진 늙은 산 만수산과 천년고찰 무량사 앞에서 세월의 오차는 부질없어 보였다. 그러한 부질없음을 오래 전부터 짐작했던 옛사람들은 만수산과 무량사를 따로 보지 않고 만수무량(萬壽無量)이라 불렀다.
후세사람들 또한 옛사람들의 예를 따라 그리 부르고 있으나 그 뜻까지 따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후 고려 고종 때 중창된 무량사는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 불전과 더불어 30여동의 요사와 12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그 위세를 자랑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현재의 무량사는 조선 인조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된 흔적이다.
매표소에서 벗어나면 일주문(一柱門)이다. 가지를 친 자리와 옹이를 다듬은 흔적이 없는 투박한 두 기둥위로 거대한 지붕이 걸터앉아 있다.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고 새겨진 편액의 글씨는 차우(此愚) 김찬균(1910~?)이 썼다. 속초 신흥사 사천왕문, 통영 미륵산 관음암 보광루, 여주 봉미산 신륵사 심검당 등 전국 각지의 사찰 편액에 글씨를 남긴 그는 주자서체(朱子書體)와 일체유심조(一切維心造)를 새긴 조그만 한반도 지형의 두인(頭印)으로 명성을 얻었다. 무량사 일주문 편액 우측 상단에도 그만의 독특한 두인이 남아있다. 전국 사찰을 돌며 많은 흔적을 남겼건만 그의 마지막 생은 물같이 바람같이 홀연해 알 길이 없다. 서예가보다는 거사(居士)가 어울렸던 인물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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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은 가장 먼저 산을 찾는다. 산기슭에 깃든 가람은 초겨울부터 선명한 겨울의 냄새를 풍긴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람을 휘감아 돌던 소슬바람이 사천왕문으로 들어서는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맨살을 스치는 찬바람은 죽비처럼 방문객들의 어깨를 스치며 정신을 깨운다. |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경내로 들기 전 사천왕문 우측으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눈에 든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돼 있다. 별다른 꾸밈없이 소박해 무심코 지나쳐 사천왕문 안으로 들기 쉽다.
당간지주는 다른 불교 수용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삼한(三韓) 시대 소도(蘇塗) 신앙이 불교의 토착화 과정 중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幢)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사찰의 깃발을, 당간(幢竿)은 당을 매단 기둥을 가리킨다. 당간지주는 두 돌기둥으로 당을 매단 당간을 지탱했다.
한때 당연한 사찰의 격식이었던 당간은 고려 말 이후 점차 사라져갔다. 선종의 발현과 더불어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등쌀에 못이긴 수많은 사찰들이 평지에서 산기슭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사찰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해왔던 당간은 산비탈 위에서 그 시각적 효용성을 잃었다. 자연스러운 도태였다. 그렇게 당과 당간은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이 도태된 양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옛 가람보다도 오래남아 사지(寺址)를 증거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평지 가람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 주축선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두 돌기둥의 방향은 가람 주축선과 평행하다. 산지 가람에서는 가람 주축선과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두 돌기둥의 방향도 가람 주축선과 직각을 이룬다.
구릉지 가람에서는 평지 가람와 산지 가람의 특징들이 반반씩 나타난다. 이러한 당간지주의 공간적 특성은 폐사지 발굴 작업에 있어 가람 주축선의 위치와 방향을 유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 더 이상 높은 바람에 펄럭이는 당은 없지만 후인들은 폐사지의 흔적을 폐사지보다 앞서 사라진 것들로 더듬는다. 그렇게 오래전 제 기능을 잃은 당간지주는 이끼와 더불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관통하며 아득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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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사천왕문을 넘어서자 비에 젖은 가람이 그윽하다. 고즈넉한 가람을 휘감던 바람이 죽비처럼 어깨로 치달아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일렬로 늘어선 석등, 석탑, 극락전의 가람배치가 점층적인 위엄으로 발걸음에 스며든 미열을 가라앉힌다. 이 단순한 가람배치 앞에서 사람들은 사천왕문을 넘던 거침없는 발걸음을 주저했다. 고찰은 고찰이다. 눈에 띄는 모든 게 문화재다. 가람을 형성하는 석등, 석탑, 극락전 또한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석등은 상대석과 하대석에 적당히 부푼 연꽃 위로 팔각 화사석(火舍石)을 갖춘 전형적인 고려 초기의 양식으로 보물 제233호다.
석등 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석탑 역시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백제계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보물 제185호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 좌상 등 삼존상이, 3층 몸돌에서 금동보살상이, 5층 몸돌에서 사리구가 수습됐다. 이들은 모두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은 법주사 대웅보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국내에 몇 안 되는 복층 불전이다. 조선 중기의 건물로 2층 구조를 가진 불전(佛殿)인데 내부는 상하층 구분 없는 통층 구조다. 세월에 빛바랜 단청은 빛바램으로써 위엄을 드러낸다. 김시습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고 전해지나 근거는 없다. 그러나 김시습의 후광 없어도 편액에 새겨진 강건한 필치는 극락전과 더불어 충분히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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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내부에는 거대한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좌상이 안치돼있다. 주존불 아미타불(5.4m)을 중심으로 양쪽에 관세음보살(4.8m), 대세지보살(4.8m)이 자리 잡고 있다.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다.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은 조각한 이의 법명(현진·玄眞)과 조성연대(1633년)를 밝히고 있어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삼존불을 감싸는 극락전 또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량사 아미타삼존불은 지난 2008년 보물 1565호로 지정됐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도 괘불(掛佛·법회나 의식을 치를 때 법당 앞뜰에 거는 대형 탱화)로 남아 극락전 안에서 아미타불과 공존하고 있다. 인조 5년(1627년)에 완성된 이 괘불은 세로 12m, 가로 6.9m의 너른 모시천 위에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 구의 화불(化佛)을 모시고 있으며 보물 제1265호다.
자극락전 우측에 리 잡은 명부전(冥府殿)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눈길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중앙 불단 위 지장보살(地藏菩薩) 양 옆으로 이제 과거가 돼버린 사람들이 물끄러미 영정 속에서 명부전 밖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49재의 흔적이다. 영정 속 주름진 표정들은 하나같이 어색해 오래 마주보기 민구스럽다. 도망치듯 시선을 거두자 명부전 옆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우뚝하다. 잎을 모조리 털어낸 나무는 굵은 가지마다 살아서 강인한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사바세계가 환하다. 문득 살아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진다.
글=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