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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철새탐조) 노을이 된 철새들, 황홀한 군무에 빠지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0. 11. 13.

노을이 된 철새들, 황홀한 군무에 빠지다
[금토일]천수만 철새 탐조 기행 전세계 가창오리 90%가 천수만서 월동 … 탐조코스 1번지 유명세
데스크승인 2010.11.12  지면보기 |  12면 정貶� 기자 | crazyturtle@cctoday.co.kr  
   
▲ '철새들의 낙원' 서산 천수만에서 가창오리가 군무를 펼치며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가창오리의 군무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유화처럼 수많은 점들로 완성되는데 전세계 가창오리의 90%가 천수만에서 월동한다. 천수만=우희철기자photo291@cctoday.co.kr
- 사람은 새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 -

추수를 끝낸 빈 너른 들녘이 잿빛 음영으로 꿈틀댔다. 지리멸렬했던 여행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마른 볏짚 내음 가득한 빈 들녘에 흩어진 나락을 향해 고개를 파묻던 기러기 무리들이 이방인의 움직임에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불청객을 주시하던 기러기들은 초병 녀석의 허둥대는 날갯짓과 동시에 일제히 솟아올라 V자로 군무를 그리며 멀어져갔다. 제 이름을 부르며 달아나는 기러기들의 꽁무니를 쫓는 사람들의 눈길은 반가움이 위협으로 오해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긴 호선을 그렸다. 기러기들은 사람들과 먼 곳에서 사람들의 나락을 주워 먹었다.

하얗게 포장된 거대한 볏짚단들이 들녘 위에서 형광색 마냥 도드라져 어색하게 빛났다. 기러기들은 어색함을 저어하지 않는 듯 볏짚단 옆에서 한가로이 부리로 깃을 더듬었다.

건널 수 없는 종(種)의 장벽 건너편 농로(農路) 위에서 새들의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어 서글픈 사람들은 새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울었다. 빈 들녘은 기러기와 더불어 외롭지 않았으나 거둔 자들의 농로는 군무의 그림자 아래에서 쓸쓸했다. 애오라지 땅에 들러붙어 갈아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자들의 울음은 거두고 모으는 운명으로부터 해방된 수많은 철새들의 이름으로 음각돼 하늘을 갈랐다.

 - 사람들이 우연하게 만든 철새들의 낙원 -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위치한 천수만 간척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철새들의 낙원이다. 지난 1984년, 천수만 갯벌과 바다의 오랜 인연의 끈이 사람들의 대역사 앞에서 단절됐다. 완강하게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방해했던 빠른 유속과 조수 간만의 차도 현대 '왕회장'의 폐선을 이용한 기상천외한 공법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8㎞ 길이의 제방 안에서 여의도 40배 면적의 농토와 2개의 거대한 민물호수(간월호·부남호)가 지각변동 없이 태어났다. 곧 대한민국의 지도가 개정됐다.

육안으로 가없는 너른 농토는 전통적인 노동집약적 농법과 작별했다. 볍씨는 저 멀리 태평양 건너편으로부터 전해져온 풍문처럼 항공기를 통해 땅으로 뿌려졌다. 어마어마한 농토는 어마어마한 양의 벼를 소출해 냈다. 지난 1998년 '왕회장'과 함께 판문점을 건너 북쪽으로 향했던 500마리의 '통일소'도 천수만 간척지 농장에서 여물을 먹고 자랐다.

   
그러나 땅속 깊이 뿌리박지 못한 벼는 쉽게 주저앉았다. 수많은 나락들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농토 위에서 방황했다. 기계는 나락을 알아보지 못했고 사람들은 나락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주인 없는 나락을 알아본 건 북쪽 나라의 혹독한 찬바람을 피해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던 철새들이었다.

인적은 드물고 나락은 가까운 낙원에 대한 소문은 철새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벌떼처럼 군무를 그리며 날아온 가창오리 떼가 호수면 위를 까맣게, 기러기 떼는 들녘을 잿빛으로 덮었다. 황새, 노랑부리저어새, 흰꼬리수리 등 천연기념물들도 조심스레 간월호·부남호 주변을 탐닉했다. 이후 천수만 간척지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종의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탐조코스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다. 이는 '왕회장'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화려한 군무로 이름난 가창오리는 천수만 간척지를 찾는 수많은 겨울철새들의 대표 격이다. 눈가의 태극무늬 때문에 '태극오리'로도 불리는 가창오리는 시베리아 동쪽 지방으로부터 한반도로 날아오는 겨울철새다.

가창오리의 천수만 사랑은 유별나다. 전 세계 가창오리의 90% 가량이 천수만에서 월동한다. 이 때문에 가창오리는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수록된 희귀조로 전 세계적인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천수만에서는 제법 흔한 겨울철새다. 그러나 머무는 개체수가 많다고 하여 군무까지 흔한 것은 아니다. 가창오리의 군무는 꽤 귀한 편이다. 야행성인 가창오리는 낮에는 쉬고 밤에만 먹이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무를 볼 수 있는 시기는 새벽녘과 해질녘뿐이다. 부지런해야 한다.

가창오리의 군무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유화처럼 수많은 점들로 완성된다. 박모(薄暮)가 수평선 위로 내려앉을 때쯤이면 수만 개의 점들이 수면에서 떠올라 일몰의 역광 속으로 녹아든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인양 가창오리 떼는 조금의 버걱거림도 없이 해독되지 않는 수많은 도형을 그리며 빈 하늘을 공명한다.

   
반면 기러기의 편대 비행은 가창오리의 군무보다는 흔한 편이다. 기러기는 경험 많고 힘센 녀석을 중심으로 V자 편대를 형성하며 천수만 상공을 가른다. 기러기들에게 있어서 V자 편대는 매우 경제적인 비행법이다. 서로의 날갯짓으로 형성된 상승 기류가 홀로 날 때보다 약 70%가량 빠르게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기러기 편대는 매우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조직이다. 기러기들은 날면서도 늘 서로를 돕는다. 선두가 지치면 다른 녀석이 그 자리를 직무 대리한다. 대열 맨 끝의 기러기는 지속적인 울음소리로 선두를 격려한다. 지쳐서 낙오할 위기에 처한 녀석이 생기면 덜 지친 녀석들이 지친 녀석과 함께 땅으로 내려와 체력 회복을 기다린다.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아는 조직이다. 기러기의 편대 비행은 가창오리의 군무보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멋스럽다.

군집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창오리, 기러기 등 오리류와는 달리 고니는 단독자로서 완성된 존재처럼 이해된다. 무리를 지어 주변을 경계하는 오리류와 달리 고니는 모든 근심을 벗어버린 듯 홀로 초연하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주변의 청둥오리들이 시끄럽게 날아다녀도 고니는 수면 위에서 고요하다. 외발로 서서 낮잠을 잘 때도, 새끼들과 수면 위에서 먹이활동을 할 때도 고니는 결코 허둥대는 법이 없다. 큰 덩치에 걸맞게 고니의 움직임은 늘 진중하고 우아하다. 어지간해서는 날갯짓하는 법이 없다. 고니는 4∼6마리 가족 단위로 모여 산다. 우아한 흰색 깃털을 뽐내며 앞서가는 고니는 암수 성조다. 그 뒤로 빨기 전 걸레마냥 지저분한 깃털의 고니는 털갈이를 끝내지 못한 새끼들이다.

밥주걱 같은 부리로 개펄을 훑으며 먹이활동을 하는 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2호)는 멸종위기야생동·식물 I급에 속하는 위태로운 겨울철새다. 특이한 부리 모양 때문에 영어권 국가에서는 'Spoonbill'로 불린다. 개펄이나 물속에 부리를 파묻고 휘휘 저어가며 먹이활동을 하는 모습 때문에 붙은 '저어새'라는 이름이나, 숟가락을 닮은 부리 때문에 붙은 'Spoonbill'이라는 이름이나 모두 기막힌 작명 감각이다.

   
노랑부리저어새는 이름처럼 사람을 매우 저어하는 민감한 녀석이어서 망원경 아니고는 좀처럼 눈에 담기 어려운 겨울철새다. 운 좋게 습지에서 먹이활동을 하던 노랑부리저어새 무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민감하기 짝이 없는 성정을 지닌 녀석들은 불청객의 방문을 너무도 쉽게 눈치 챘다. 모가지를 쭉 빼고 달아나던 노랑부리저어새 무리 중 한 녀석이 힐끗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취재진을 바라보았다. 기다렸지만 녀석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2000년 말, 철새들의 낙원에 위기가 닥쳤다. 간척지의 소유주였던 현대건설이 IMF 금융위기로 벌어진 유동성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농토의 일부를 쪼개 일반인들에게 매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분할 매각된 농토는 대규모 영농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졌다. 추수 후 볏짚까지 모두 걷어가는 바람에 나락의 양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는 철새들의 생사를 위협하는 큰 문제였다.

시민환경단체들은 매각을 막기 위한 천수만보전시민연대를 결성해 철새보호대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현대 역시 일단 살고 볼 일이었다. 철새보호를 통한 관광자원화 이익을 의식한 충청남도는 지난 2003년부터 철새도래지 주변 농지소유주들과 '생물다양성 관리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생물다양성 관리계약'은 벼농사에 있어 농약 사용을 자제하고, 철새들이 곡식을 쪼더라도 쫓아내지 않으며, 추수 후에도 나락을 남겨 놓도록 하는 대신 농지소유주에게 손실액을 보전해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철새 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확산에 따라 이후 자치단체별로 다양한 정책들이 입안·추진됐다.

그러나 몇 년 전 조류독감의 창궐 당시, 철새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이러스의 매개체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다. 철새의 배설물을 통한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인체 감염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가금류 농가의 생존권 주장과 전 국민적인 공포 앞에서 철새들의 군무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 당시 공포의 상흔은 이제 많이 아물어 철새들의 군무 또한 다시 아름답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복고풍 유행처럼 찾아드는 조류독감 앞에서 사람들과 철새들 간의 생존권 다툼 재발 가능성은 여전하다. 극단적인 생존권 다툼 앞에서 패자는 결국 말 못하는 철새일 수밖에 없다.

멸절의 불안을 늘 예비하고 있는 낙원의 들녘 위로 철새들의 그림자가 고요하게 비쳐온다. 간척된 천수만은 광활한 갯벌을 잃은 대신 수많은 철새들을 얻었다. 무언가를 잃은 대신 얻어낸 결과물이라면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최소한의 산술적 평형을 이루는 길이리라. 그것이 비록 우연의 산물일지라도… 유효기간을 알 수 없는 낙원, 천수만은 올해도 어김없이 수많은 겨울철새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