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월당의 부도는 타 부도와 구별되는 양식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조선 시대의 것이되 신라와 고려의 양식을 따르는 부도는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던 매월당의 의지를 짐작케 한다.

주지 스님의 거처 우화궁 뒤로 편액조차 없는 전각 한 채가 있다. 이곳에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자화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1497호인 이 그림은 원본 그대로 전해져 오는 몇 안 되는 조선 초기의 초상화다. 비록 액자에 담긴 그림은 모사본이나 액자 속 날카로운 눈빛과 살짝 찌푸린 표정을 통해 당시 매월당의 세상을 향한 냉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매월당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친 이웃집 아이의 영특함에 놀란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은 논어(論語)의 첫머리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일호(不亦說乎)'에서 '시습'을 따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3세에 맷돌에 갈려 흩어지는 보리를 '마른 하늘의 천둥소리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누런 구름'이라 읊었던 이 신동은 5세에 세종으로부터 그 재주를 인정받아 "언젠가 큰 재목으로 쓰겠다"는 약조까지 얻어냈다. 오세(五歲)라는 명성은 조선 팔도로 퍼져나갔다.

천재소년 송유근 군의 등장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가히 신화적인 이 같은 이야기는 패관잡기, 해동잡록 등 야사(野史)의 한 귀퉁이에 실려 전해오고 있지만, 매월당이 어려서부터 남달랐음만은 분명한 듯 싶다.

대개 신동들의 청소년기가 그러하듯 매월당의 청소년기 역시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읜 매월당은 이후 외가에 얹혀살았지만 이 또한 외숙모의 별세로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다시 상경한 매월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였다. 자신의 미래를 약속했던 세종은 그 사이 승하했다. 충분히 견딜만했다. 그러나 21세 때 벌어진 단종 폐위 사건은 매월당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다. 자신의 모든 배움을 부정하는 힘의 논리 앞에 절망한 매월당은 명분 없이 피 흘리는 유가(儒家)의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매월당은 그때까지 읽었던 모든 책들을 불태운 뒤 삼각산에서 내려와 머리를 깎고 승려를 자처했다.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으로 방랑길에 들어선 매월당은 관서, 관동, 호남 등을 주유하다 31세 때 경주 금오산 남쪽 용장사(茸長寺) 터에 닻을 내렸다.

인적 드문 폐사지에서 희미한 극락의 흔적을 보았던 매월당은 그곳에 토굴을 지어 금오산실이라 부르고 매화나무도 심었다. 토굴 안에서 매월당은 시와 소설로 이상적인 인간상과 세상을 쫓으며 불가능을 꿈꿨다. 금오산실에서 완성된 다섯 편의 소설은 금오신화(金鰲新話)로 묶였다. 그렇게 37세 때까지 매월당은 토굴 속에서 자신만의 낙원을 건설했다.

그러나 매월당은 뼛속까지 방랑자였던 듯 싶다. 방랑은 결국 또 다른 방랑으로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매월당은 오랜 칩거 끝에 토굴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47세 때 홀연히 환속해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부인까지 맞아들였지만 이듬해 조정에서 벌어진 중전 윤 씨의 폐비 논의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이후 매월당은 육신의 힘이 다할 때까지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삶을 이어가며 세상을 조롱했다. 당대의 권신들은 매월당의 기행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의 문장을 두려워해 침묵했다. 호남을 여행하던 중 병을 얻은 매월당은 무량사에서 잠시 방황의 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 끈을 붙들지 못했다.

무량사는 매월당의 마지막 안식처다. 무량사와 매월당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둘의 인연은 2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내 곳곳에 깃든 매월당의 그림자는 깊다. 그 그림자의 절정은 매월당의 부도다. 매월당의 부도는 2.84m의 높이로 무량사 부도군 중앙에 우뚝서있다. 조선 시대의 것임에도 불구 마치 당대의 가치를 부정하듯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의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다.

특이하게도 부도 앞에는 '五歲金時習之墓(오세김시습지묘)'라고 새겨진 조그만 비석도 하나 서있다. 부도이나 부도 같지 않은 모습은 승려도 속인도 아닌 삶을 살다 죽은 매월당의 복잡한 내면과 삶을 닮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월당의 사후는 그가 버렸던 유가의 세상에 의해 찬란했다. 선조는 율곡 이이를 시켜 매월당의 전기를 지으라 명했고, 정조는 그를 이조판서로 추증해 영월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매월당은 천재의 이미지에 절의의 화신까지 더해져 정치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과연 부도 속 사리 1과로 남은 영원한 아웃사이더 김시습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화려한 부활이 달가울지는 의문이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