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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27. ‘채송화’ 보며 꽃처럼 살고 싶었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7. 30.

채송화를 보고도 채송화인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무척 놀랐다.

분명히 그들은 채송화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또 채송화를 자주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본 꽃이 채송화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오버 같지만 뭔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7월 31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동요 ‘꽃밭에서’ 중)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관계없는 것들을 마음에 두기란 쉽지 않습니다. 꽃을 봐도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그 꽃이 당장의 끼니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몇몇 꽃은 익숙한 이름입니다. 기자는 그 이유를 동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수원길’은 아카시아를, ‘봄나들이’는 개나리를, ‘고향의 봄’은 복숭아꽃과 살구꽃을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겼죠.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정수사업소에서 촬영한 채송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하지만 동요 때문에 익숙한 이름이어도 그 꽃의 모양까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전투 같은 일상 속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이니까요. 여러분은 복숭아꽃과 살구꽃, 아기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할 수 있으신가요? 자신 있게 대답할 분은 몇 없을 것 같군요. 동요 ‘꽃밭에서’에 등장하는 채송화도 그런 꽃들 중 하나입니다.

채송화는 남아메리카 원산의 한해살이풀로, 마당의 구석이나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곳에 주로 관상용으로 식재됩니다. 채송화는 매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붉은색, 노란색, 흰색 등 다양한 색의 꽃을 피우죠. 채송화는 여름철새인 뜸부기가 찾아오는 여름에 핀다는 이유로 ‘뜸북꽃’, 땅에 들러붙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땅꽃’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러하듯이 채송화도 한약재로 쓰이는데, 전초를 반지련(半支蓮)이라고 부릅니다. 반지련은 외용약으로 쓰여 열을 식히고 독을 풀어주는 작용을 한다는군요.

채송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한낮에 져서 저녁에는 언제 꽃을 피웠었냐는 듯이 시치미를 뗍니다. 이 같은 생태 때문에 채송화는 ‘하루살이꽃’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죠. 오늘 본 꽃을 내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채송화는 매일매일 ‘신상’인 셈입니다. 한 계절 내내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내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채송화가 매일 새로운 꽃을 피우고 흔하게 보이는 이유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입니다. 채송화는 토양을 가리지 않는 편이어서 어디에서나 잘 자랍니다. 심지어 줄기를 끊어 모래에 꽂아도 뿌리를 내릴 정도이죠. 또한 채송화는 다육식물처럼 수분을 가득 머금은 두툼한 줄기와 잎을 가지고 있어 한여름 가뭄에도 생생함을 뽐냅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일출봉 부근에서 촬영한 채송화.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웬만한 히트곡이 아닌 이상, 어떤 노래이든 2절은 1절보다 낯섭니다. 동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꽃밭에서’의 2절을 기억하시나요?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무언가 애잔함이 느껴지는 가사입니다.

채송화라는 이름을 알고 꽃과 자주 마주쳤어도, 그 이름과 꽃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자의 주변에는 많았습니다. 익숙함과 익숙함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는 저마다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방증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꽃 보며 꽃 같이 살 수 있는 걸까요. 채송화의 꽃말 ‘순진’, ‘천진난만’이 점점 일상과 먼 단어가 돼 버리는 것 같아 기분이 신산해집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