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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28. ‘베롱나무’ 간지럼에 더위의 짜증도 후다닥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8. 6.

서울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원래 추위에 약해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식물인데...

역시 지구온난화 문제 떄문인가...


간만에 배롱나무를 간지럽혀 봤다.

근데 내 손길이 시원치 않은지 잘 움직이지 않더라.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8월 7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패션에 있어서 보색(補色)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보색을 활용한 패션은 강렬한 색의 대조로 주목을 받기 쉽기 때문이죠. 파란색의 보색은 주황색입니다. 한여름 파란 하늘 아래에서 붉은색 계열의 색이 유난히 눈에 띄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우겨보겠습니다.

붉은색은 흔히 정열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일컬어지죠. 그러나 봄날의 산하에서 물결치는 연둣빛이 만 가지 색으로 빛나듯, 붉은색의 색감도 천차만별입니다. 강렬하게 시각을 자극하는 칸나의 핏빛 검붉은 색도 있지만, 부드럽게 시야를 감싸는 진달래의 연분홍색도 있으니까요. 이맘때면 흔히 눈에 띄는 배롱나무는 너무 강렬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선홍색 꽃을 여름 내내 피웁니다. 배롱나무가 오랜 기간 동안 꽃을 피우면서도 질리지 않는 이유이죠. 개중에는 흰 꽃을 피우는 녀석도 있지만 배롱나무는 역시 붉은꽃을 피워야 제맛입니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에서 촬영한 배롱나무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배롱나무의 독특한 이름은 백일홍에서 유래됐습니다. 여름 내내 붉은 꽃을 피우는 모습이 백일홍과 흡사해 백일홍나무라고 불리던 것이 배기롱나무를 거쳐 배롱나무로 변화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백일홍과 배롱나무의 생태는 완전히 다릅니다. 백일홍은 한번 피운 꽃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반면 배롱나무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가지에서 끊임없이 피고 져서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가장 큰 차이는 백일홍은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풀, 배롱나무는 중국 원산의 관목(보통 사람의 키보다 낮은 나무)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비밀도 아닌 비밀이지만 백일홍과 배롱나무의 개화기간은 사실 100일이 안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고금의 좋은 전통인 ‘에누리’가 있습니다. 눈감아주세요.

배롱나무는 예로부터 간지럼을 타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줄기를 살살 문지르면 희한하게도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자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 몇 번 배롱나무에게 간지럼을 피워봤는데,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기자의 고향인 충청도에선 배롱나무를 간즈름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선 배롱나무를 ‘저금 타는 낭’이라고도 부른다는군요. 제주도 방언으로 ‘저금’은 간지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선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동물처럼 신경을 가지지 않은 배롱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이유에 대해, 가장 유력한 의견은 얇은 수피에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수피가 매우 얇고 쉽게 벗겨집니다. 이 때문에 나무에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잎이나 줄기로 바로 전달돼 가지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죠.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서 촬영한 배롱나무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여느 식물과 마찬가지로 배롱나무 역시 한방에서 여러모로 쓰이는 약재입니다. 한방에선 배롱나무의 잎을 자미엽(紫薇葉), 뿌리를 자미근(紫薇根)이라고 부르는데 어린이의 백일해와 기침, 여성들의 방광염과 냉증에 효능을 보인다고 합니다. 꽃은 그늘에서 말려 차로 달여 먹거나 기름에 튀겨 먹고요. 여러모로 기특한 식물입니다.

이맘 때 나뭇가지를 풍성하게 채운 배롱나무 꽃을 바라보면, 꽃말인 ‘부귀’를 절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꽃 앞에선 더위에 지쳐 짜증스러웠던 마음도 절로 너그러워집니다. 맑은 날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길에서 배롱나무를 만나시거든 슬쩍 간지럼을 피워보시죠. 꽤 즐거운 경험이 될 겁니다.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