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이명'의 필자로 만난 8번째 인터뷰이는 싱어송라이터 박준하이다.
2014년 첫 EP를 발표했을 때부터 꾸준히 챙겨들어왔던 뮤지션인데, 세션 기타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자신을 놓고 간결하고도 단단한 팝을 만들어 들려줘 적잖이 놀랐다.
좋은 뮤지션이다. 앞으로는 기타리스트보다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가 훨씬 더 익숙해지길 바라며..
박준하 “뻔해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은 음악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관성의 힘은 대단히 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고 있지만, 불만족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비록 불만인 일상이지만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고, 또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일은 꽤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싱어송라이터 박준하는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았던 꽤 잘나가는 세션 기타리스트였다. 조로 현상이 심각한 대중음악계에서 세션 연주자들은 대개 나이 서른즈음에 고비를 맞는다. 수요는 한정돼 있는데 아래에선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새파란 후배들이 치고 올라와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2년 전 서른을 앞뒀던 그가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것은 자신의 음악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신인이라고 부르기에 조금은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 EP ‘내 이름은 연애’는 그 시작이었다.
이후 차근차근 경력을 쌓기 시작한 박준하는 지난해 7얼 EBS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 발굴 프로젝트 ‘헬로루키’로 선발되며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증명했다. 그가 올해 초에 발표한 첫 정규 앨범 [달이 말라가는 저녁]은 간결하면서도 단단한 팝을 선보이며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지난달 27일 서울 마장동의 한 고기집에서 그를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술 때문에 놓친 자세한 이야기는 이메일로 대신했다.
데뷔 후 첫 정규 앨범이다. 소감을 듣고 싶다.
감격보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이전의 작업들보다 큰 사이즈의 작업이라 부담도 됐고. 작업할 때 예민한 편인데 그 열이 쉽게 식지 않는 기분이랄까. 음원이 풀린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 뒤 낮잠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사실 첫 EP가 나왔을 때보다 오히려 무감각했다. 첫 EP가 나왔을 땐 마냥 좋았다. 막 나온 CD를 받아든 날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땐 제작부터 기획, 유통까지 혼자 했다. 하지만 이번엔 참여한 사람들이 몇 배로 많아져 부담이 컸다. 그래서 뭔가를 이뤘다는 기쁨보다 안도감이 먼저 찾아온 것 같다.
‘달이 말라가는 저녁’이란 앨범의 타이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 실린 곡 ‘Moondry Evening’을 의역한 것이다. 그 곡은 이번 앨범의 정서적 출발점이다. 모든 곡들을 같은 이미지로 묶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곡들을 모아놓고 보니 ‘희미해지다 사라진, 잃어버린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달이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변해가는 과정의 이미지로 그런 감정들을 은유하려 했다.
첫 EP ‘내 이름은 연애’ 때에도 그랬지만 박준하의 음악에 담긴 화두는 늘 사랑과 이별이다. 뻔하다면 뻔한 주제이지만, 이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말하자면, 연애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잘 된 이별이란 건 없지 않은가? 생각대로 쓸수록 맛이 나는 재료이기도 하고. 클리셰라 부를 수 있지만 연애라는 주제를 통해 표현하는 게 나의 취향과도 맞다. 작업할 때 늘 멜로디에서 출발하는편인데, 여기에 자전적인 내용을 담는다거나 메시지를 넣자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덜 익었다고 생각한다.
사운드가 간결하면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편이다. 녹음과 마스터링 과정은 어떻게 진행됐는가?
나는 생각하는 사운드가 분명히 나올 때까지 녹음을 멈추거나 되풀이하는 편이다. 그런데 곡의 수가 적지 않아 비용과 시간을 아껴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연주자들과 내가 생각하는 지점이 만날 때까지 대화를 많이 했다. 드럼과 피아노 녹음을 단시간에 완료하고, 거기까지의 작업을 뼈대로 삼아 베이스와 기타 작업은 대부분 개인 작업실에서 진행했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아날로그 장비의 힘을 믿지만, 연주 컨디션도 중요했기 때문에 무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타와 베이스 녹음만큼은 시간을 넉넉하게 투자하고 모니터도 세심하게 했다.
EP부터 지금까지 녹음을 도와준 허정욱 엔지니어는 나와 군대 선후임으로 만났다. 군대에서 그에게 “나중에 이런 것을 할 거야”라고 말하며 데모를 들려주곤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현실이 됐다. 나는 먼저 염두에 둔 사운드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본 다음, 그와 구현 가능 여부를 상의해가며 녹음을 진행했다. 1집을 준비하는 도중 허 엔지니어가 결혼을 해서 녹음과 믹스를 한 달 정도 쉬었는데, 그 때 혼자서 이것저것 건드려본 게 나름 노하우가 돼 앨범에 많이 녹아들었다.
마스터링은 늘 아스트로비츠(BK! Astro bits)에게 맡긴다. 그는 안전한 기성품보다 힘 있고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추구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사운드를 잘 이해해줬다. 또한 그는 아날로그 장비에 고유의 노하우를 더해 아쉬웠던 부분들을 잘 채워줬다.
실용음악과 출신에 세션 연주자로 많은 활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이 음악에서 도드라지게 들리지 않는다. 대단히 간결하면서도 편안한 팝이다. 자신의 무언가를 내려놓는다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쉽진 않았다. 그리고 자주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내 작품인데 일(세션)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연주 앨범을 냈을 수도 있겠지만, 연주만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싱어송라이터’ 박준하의 음악을 구상할 땐 악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즐겨 듣던 음악들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담았다. 내가 풍성한 성량을 자랑하는 보컬이라면 지금보다 아카데믹한 접근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보니 목소리에 어울리는 연주를 고민하는 동시에 연주 위에 얹을 최선의 보컬에 대해 고민했다.
트랙 순서대로 주요 곡들을 설명하겠다. ‘Beautiful Days’는 앨범의 문을 여는 곡으로는 가장 화사한 곡을 담고 싶어 첫 번째 트랙에 담은 곡이다. ‘몰라서 하는 말’은 처음으로 베이스 기타를 쥐고 만든 곡인데, 세상에 대한 푸념을 노래했다. ‘우리는 해피엔딩처럼 만났었지만’은 EP의 타이틀곡이었던 ‘우리는 서로의 착각이었네’의 후속작인데, 이 곡을 통해 현악 편곡과 녹음을 처음 해보게 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번 앨범의 메인 타이틀곡인 ‘잘못된 안녕’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고민을 담은 곡으로, 뻔한 사랑 노래라고 할 수 있지만 분위기와 리듬은 결코 뻔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닮은 사람’은 기타 연주 없이 만든 곡인데, 음악 속의 공간이 매우 크게 느껴져 작업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아니었다고’는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마이크를 옛날 방식으로 사용해 녹음했다.
마지막 트랙 ‘Moondry Evening’은 “달은 날씨에 따라 희미해지는 빛이고, 빛이 말라가는 이미지는 사라져가는 감정들과 연결된다”는 생각에서 착안해 사람이 감정에 충실해지는 시간인 저녁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집중해 들어줬으면, 혹은 이 부분만큼은 놓치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가?
무드이다. 앨범 한 장으로 어떤 무드를 만들어 낼 것인가, 그리고 몇 곡만 들었을 때도 전체와 연결되는가를 많이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각 곡의 고유성과 ‘한 곡’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템포나 장르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무드를 통일시키기 쉽겠지만, 다양한 템포와 장르에 비슷한 무드를 끼얹는 데 재미를 느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번 앨범에 작사로 참여한 강그늘 씨는 ‘아니었다고’와 ‘Moondry Evening‘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자주 비췄다. 듣는 사람마다 곡들이 주는 메시지를 자유롭게 느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는가?
음악을 좋아하기 이전에 뮤지션이 멋져 보였다. 나이차가 나는 형과 사촌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해적판 음반, 라이브 실황 비디오를 접하고 ‘핫뮤직’ 같은 음악잡지를 탐독했다. 나는 만화를 좋아했고 또 즐겨 그렸었는데, 뮤지션들은 그 만화에서 튀어 나온 사람들 같았다. 처음엔 드럼을 연주하고 또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별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기타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사춘기를 과묵하게 보냈고 또 그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주목을 받고 싶었는데 그 선택이 악기였던 것 같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해오다 싱어송라이터로 전향했다. 계기는 무엇인가?
노래에는 큰 재능이 없어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드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많은 노래를 들어야 했고, 또 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서른도 가까워 오는데 내 이름이 박힌 뭔가를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첫 EP를 제작했다. 용감하게 이직을 하거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친구들을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손놓고 있는 게 우습게 보였다. 예고 기간제 교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을 앨범 제작에 올인했다. 연주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세션을 하면서도 기타를 연주하면 편곡을 나눠 맡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앨범을 만들 때에는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 들었다.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없더라도 특정 뮤지션의 카피캣이 되긴 싫어서, 그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담았다.
강그늘 씨는 글을 잘 쓴다. 내가 구상에 대해 추상적으로 얘기하면 구체적인 부분을 잡아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별 것 아닌 부분들에 의미가 생기고, 읊조리는 중에도 힘이 생긴다. 내가 부르고 발표한 곡이지만, 나는 그런 가사를 못 쓸 것 같다.
다른 누군가의 음악은 연주하다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때의 자세와 기분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장ㆍ단점이 있는가?
일단 양쪽의 애로사항을 모두 알게 된 바람에 둘 다 소홀히 할 수 없게 됐다. 차이가 있다면 아무래도 무대에서의 부담감이 다르고, 연주에 있어서 집중하는 지점이 다르다. 예를 들어 세션은 자기 파트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파트가 주목 받을 땐 서포트를 해주는 기분이지만, 내 음악을 선보일 때엔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끝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마치 세션이 배우라면, 싱어송라이터는 작가와 PD를 동시에 맡은 존재 같다. 모든 부분에 예민해지고 욕심대로 안될 땐 나에게 화가 난다. 양쪽 모두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라 호환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장ㆍ단점을 생각하기보다는 균형을 잘 유지하고 싶다.
지난 2월 정규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개최한 바 있다. 앞으로 단독 콘서트 일정이나 무대에 오를 예정인 공연이 있는가?
현재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오는 7월께 앞으로 발표할 곡들을 시험해 볼 무대를 만들 계획 중이다. 소규모 편성 혹은 풀밴드로 녹음을 염두에 둔 공연을 해볼 생각이다.
앞으로 서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규모가 작더라도 외국무대에 서보고 싶다. 언어는 전달하지 못해도, 내가 생각한 그림은 외국인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VJing(공연 시 무대 배경에 영상효과를 연출하는 작업)이나 영화 영상물과 함께 하는 공연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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