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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왕 정진영

<식물왕 정진영> 78.조그만 ‘새팥’이 없었다면 동지팥죽 맛도 몰랐을 걸?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6. 12. 22.
꽃이 피지 않는 겨울이 되니 확실히 소재를 찾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히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꽃들을 주제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은 쉽다.

그런데 이왕이면 겨울에도 엮을 수 있는 주제의 꽃을 다루려다 보니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월하게 소재를 찾았다.

마침 어제가 동지였는데, 동지하면 팥죽 아닌가?

하지만 팥의 꽃을 본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팥의 원조가 실은 새팥이란 사실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다.

소재 당첨!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12월 23일자 26면 사이드에도 실린다.





[HOOC=정진영 기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절기인 동지(冬至)가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동짓날에 팥죽을 드셨나요? 동짓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팥죽이죠. 붉은색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던 옛사람들은 동짓날이면 붉은색인 팥으로 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렸습니다. 요즘에는 동짓날에 직접 팥죽을 쑤어 집안에 뿌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동짓날이면 팥죽을 식당에서라도 챙겨 먹는 분들이 적지 않죠. 

그런데 말입니다. 팥도 꽃을 피우는 식물이란 사실을 아시나요? 그리고 우리가 먹는 팥이 실은 매우 작은 한 식물로부터 비롯된 개량종이란 사실을 아시나요? 조그만 새팥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동지팥죽의 맛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대전시 중구 정생동 야산에서 촬영한 새팥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새팥은 콩과의 한해살이풀로,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 지역에 널리 분포합니다. 새팥은 시골의 논둑이나 밭둑뿐만 아니라 도시의 공원에서도 흔히 보이는 식물이죠. 매년 여름과 가을 사이의 문턱에서 새팥은 내부로 원을 그리며 말려 들어가는 독특한 모양의 노란 꽃을 피우는데, 그 크기가 작아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보다 더 앙증맞은 모양을 가진 꽃도 드물죠. 나태주 시인의 시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새팥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꽃을 피웁니다.

식물의 이름 앞에 붙는 ‘새’라는 접두어는 기준이 되는 식물에 비해 품질이 낮거나 모양이 다름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새팥의 깍지와 열매는 팥에 비해 크기가 상당히 작아서, 과연 먹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쓸모에 의해 새팥과 팥의 위치가 바뀐 셈이죠. ‘새’가 ‘사이’나 ‘틈’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새팥은 경작지나 마을의 빈 터에 사는 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기자는 후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전자를 따르면 원조인 새팥 입장에서 조금 억울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대전시 중구 정생동 야산에서 촬영한 새팥꽃.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지만, 반대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서당은 동짓날에 입학식을 열었습니다. 서양에선 동짓날을 기점으로 죽어가던 태양이 다시 살아난다고 여겼다더군요. 동ㆍ서양 모두 동짓날을 한 해의 끝과 겨울의 한복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으로 본 셈입니다. 옛사람들이 왜 하필 동짓날에 벽사의 의미를 담아 팥죽을 쑤어먹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 한해 우리 곁을 조용히 스쳐간 새팥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지난 실수에 집착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작은 새팥이 큰 팥으로 변신했듯이 말이죠.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