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자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즘 문학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최근 가장 큰 흐름은 SF와 퀴어 서사의 대두다.
한창 열풍이 일었던 페미니즘 이슈는 이제 철이 지난 느낌이고, 그 자리를 퀴어 서사가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성 간 동성애를 다룬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여성 간 동성애를 다룬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을 기사로 다뤘다.
퀴어 서사를 다룬 소설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성애자의 사랑도 저마다 다르고 복잡한데, 사랑의 형태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에 관해 말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그 사랑이 가볍진 않다는 건 알겠다.
문화일보 7월 10일자 25면 톱에 기사를 실었다.

■ 박상영·김세희 작가, 동성애 다룬 신작 나란히 출간
-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HIV 감염자된 동성 연인에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덤덤하게 사랑의 본질 그려내
- 김세희 ‘항구의 사랑’
졸업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여고생들간의 절절한 감정
“그때 그건 뭐였을까” 질문
최근 한국 소설에서 페미니즘에 이어 동성애를 다룬 퀴어 문학이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부터 퀴어 서사를 다룬 작품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퀴어 문학이 주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사랑의 모습은 모두에게 저마다 다른데, 사랑의 형태를 규격화해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박상영 작가의 새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창비)과 김세희 작가의 새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민음사)은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남’과 ‘남’, 전혀 가볍지 않은 사랑의 무게 = 박상영은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퀴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대표작인 중편소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으로 2019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이번 연작소설집은 영국으로 판권이 팔려나갔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맨부커상을 받은 데버라 스미스가 이번 신작을 주목했다. 그야말로 ‘핫한’ 작가다.
이번 소설집엔 네 편의 중편과 단편이 실려 있다. ‘재희’는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 남성의 독특한 동거와 우정을 그린 도발적인 소설이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20대 주인공과 1990년대 운동권 출신 남성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애증, 주인공과 상대의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다양한 사회 문제를 두루 짚어낸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떠나 버린 사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의 후일담 소설이다. 두 소설은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둘의 사랑을 담담하게 그려내 슬픔을 더한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사랑은 위태롭고 혼란스럽지만, 절망적이란 인상을 주진 않는다. 박 작가 특유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 때문일 테다. 이성애자의 사랑 또한 달콤한 외피를 뜯어내고 들여다보면 위태롭고 혼란스럽긴 마찬가지 아니던가. 상대방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대도시의 사랑법’ 속 사랑이 이성애자의 사랑보다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 작가의 퀴어 서사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여’와 ‘여’, 그 시절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 김 작가의 ‘항구의 사랑’은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를 배경으로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을 쓰는 여학생들 간의 사랑을 그린다. 소설에 따르면 여중·고교에서 여학생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귀는 일은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여성의 연애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감정이어도 사랑의 감정이 학창시절과 함께 끝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김 작가는 자신의 학창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여학생들의 사랑을 소환하고, 이들의 사랑이 왜 졸업과 동시에 사라졌는지 살핀다.
소설은 주인공 ‘준희’를 비롯해 커다란 워커에 흘러내리는 힙합바지를 입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인희’, 유행에 휩쓸려 레즈비언인 척하는 아이들 때문에 진짜 레즈비언들이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규인’ 그리고 선배 ‘민선’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누고 교사들은 이를 막느라 바빴다. 준희 또한 민선을 향한 깊은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준희를 둘러싼 세계는 급변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은 이성애뿐인 캠퍼스의 분위기 속에서 준희는 자신의 경험을 결코 남들과 공유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런 준희에게 갑작스럽게 연락해 고등학교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캠퍼스까지 찾아온 인희는 불청객일 뿐이다. 불편함을 느끼는 준희에게 인희는 “그건 다 뭐였을까”라고 묻는다. 준희는 “그땐 다 미쳤었어”라며 부정하지만, 현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 시절의 감정 또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고 살아갈지라도, 열정을 다한 그 시절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의 스펙트럼이 한 뼘 더 넓어지는 순간이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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